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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6-22 16:21

  • 오피니언 > 윤만보 작가 이방실 장군이야기

이방실 장군 이야기 19

기사입력 2026-04-2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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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만보 작가
전 경찰서장(총경)


목인길은 죽어있는 안우의 품속을 뒤져서 교지를 찾아서 김용에게 갖다받쳤다. 김용은 교지를 불사르고 임금에게 가서 보고했다.

전하 조금 전에 안우 상원수가 군사를 몰고 행궁에 침입하였사옵니다.”

뭐라고? 그들에게 용서한다고 상까지 내렸거널... 그래 어찌하였는가?”

안우는 잡아서 바로 목을 베었습니다만 데려온 군사들은 궁밖에 대기하였다가 안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조리 달아났습니다.”

두 사람, 이방실과 김득배는 어찌되었는가?”

그들은 아직 개경 본진에 머물러있는 듯 하옵니다. 속히 군사를 보내어 두 놈을 추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라, 그리하라 내 그대의 말을 믿고 놈들을 진작 역모로 다스리려 하였는데, 신하들이 말려서 그 동안의 공으로 보아 상까지 내려주고 죄를 용서해주었는데 기어이 놈들이 역모를 꾀하였구나 속히 군사를 보내서 꼭 잡아들이도록 하라.”

임금의 목소리는 덜덜 떨고 있었다. 김용은 순군(巡軍, 임금이 직접 명하여 국사범을 처리하는 군사, 조선시대 금부에 해당)대장을 불러서 임금의 명을 전하였다.

 

안우를 호위하고 갔던 군사들은 도망을 처서 개경 본진에 있는 이방실 김득배에게 사실을 알렸다. 순군이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군마를 타고 이미 도주를 했다.

김용은 이방실, 김득배가 도주했다는 보고를 받자 임금에게 고하고 명을 받아 이들을 전국에 수배했다. 임금은 각현과 고을 수령에게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안우 등이 불충한 마음을 먹고 총병관 정세운을 멋대로 살해했다. 안우는 그 죄로 이미 처형되었다. 이에 이방실과 김득배는 도주하였으나 그 죄가 백일하에 들어났으므로 누구든 그들을 추포하는 즉시 참수하라. 공이 있는 자는 세 등급까지 벼슬을 올려주겠다.”

 

이방실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라 혼자만이라도 임금을 찾아가서 누명을 벗고자 임금이 있는 행재소로 찾아갔다. 가는 길에 잠시 용궁현에 머물렀는데 상장군 오인택이 용하게 은신해있는 곳을 알고 들이닥쳤다.

이방실은 붙잡혀 뜰로 끌려나오면서 소리쳤다.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 김용이 전하의 교지를 위조하여 우리에게 총병관을 죽이라 했다. 역적은 따로 있다. 김용이 역적이다!”

이방실은 소리소리 질렀으니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인택이 소리를 지르는 이방실을 향하여 칼을 내리쳤다. 이방실은 이를 피하여 옆에 섰는 군사의 칼을 빼앗아서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담을 넘어 도망을 하다가 뒤를 쫓는 낭장 정지상이 휘두는 칼에 맞았다. 이방실은 숨을 거두면서 말했다.

역적은 따로 있다. 김용이 역적이다.”

 

김득배는 따로 도망하여서 선영이 있는 산양현(문경시 산양면)에 숨어지내다가 순군 체포조에게 주살이 되었다. 이로써 역모죄에 연루된 삼 원수 모두가 살해된 것이다.

 

고려사에는 세 사람의 죽음을 삼원수 살해사건으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억울함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삼원수의 죽음을 전해들은 세상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편안히 먹고 사는 것은 세 원수 덕분이다라고 애통해하며 눈물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원수 살해사건은 정적인 정세운을 제거하기 위한 김용의 간계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그에 따른 정치적 파장은 매우 컸다. 즉 정세운과 삼원수로 대표되던 원로 군벌들이 제거된 것은 동시에 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친 최영, 이성계 같은 신흥군벌이 중앙무대에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악인(惡人) 김용에게는 가장 큰 장애물인 정세운이 제거되었으므로 이는 원나라와 손을 잡고 공민왕을 제거하고자 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옮길 수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곧 흥왕사에서 기도한 공민왕 살해 마수사건으로 이어졌다.

 

흥왕사의 변(興王寺)

 

두 차례에 걸쳐서 대규모 홍건적의 침입으로 홍역을 치른 고려는 그동안 추진해왔던 배원 정책을 재고하고 다시 친원 정책으로 회귀하려 했다. 그것은 전쟁을 치르면서 국력이 쇠약해진 탓도 있지만 요동벌로 쫓겨 간 홍건적의 잔당들이 언제 또다시 고려를 침범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원나라와 손을 잡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그동안 배원 정책에 불만을 품어오던 세력들이 은밀하게 공민왕 축출 운동을 벌였으니, 그들은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기황후를 움직여서 왕을 폐하는 대신 심양에 있는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왕으로 옹립하고자 하였다.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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