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만보 작가
전 경찰서장(총경)
11월의 날씨는 벌써 추위가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는 진눈깨비로변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진눈깨비는 피난길의 고생을 예고라도 하듯 점점 세차게 뿌려댔다.
왕의 행렬이 궁 밖에 나타나자 많은 백성들이 왕의 피난길에 따라나섰다. 왕의 행선지가 어딘지 모른다. 남경이 되든 더 멀리 동경이 되든 어디든 왕을 따라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믿는 백성들은 등짝에다 짐을 작뜩 올리고 그 위에 어린 것을 올리고서 무작정 따라나섰다. 나이 많은 노인은 지팡이를 들려서 억지로 끌고갔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짐 보퉁이를 하나씩 챙겨들고서 왕의 행렬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그들의 입에서 임금과 조정에 대한 욕설이 터져나져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금이 저만 살려고 저렇듯 도망치고 있으니 우리 같은 백성들은 어디가서 목숨을 보전하누?”
“백년 전에도 이러하였다고 하는구먼, 왕은 야밤을 틈타 강화도로 도망가고 남은 백성들은 갈길을 몰라 길거리를 헤매다가 적도에 붙잡혀서 죽기도 하고 부녀자들은 겁탈을 당하고,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이번에 쳐들어 오는 홍건적 놈들도 잔학하기가 몽골 놈들 못지않다 하네, 아이 밴 여자의 배를 갈라서 아기를 꺼내어 삶아 먹기도 하고 부녀자의 젖을 잘라서 구워먹기도 하고, 아이고 무서워라.”
백성들의 원망과 욕설이 임금을 수행하는 대신들의 귀에까지 들렸으나 누구도 이들을 붙잡아 나무라거나 추국하려 들지 않았다.
피난 길의 고생스러움은 임금을 수행하는 신하나 이들을 따라가는 백성이나 마찬가지 이므로 욕을 하는 사람도 이를 듣는 사람도 아닌 척, 못 들은 척하고 묵묵히 살기 위한 걸음만 재촉할 뿐이었다.
왕의 피난 행렬이 이천현에 다다르자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다. 눈보라가 눈 앞을 가려서 더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왕은 젖은 옷을 말릴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장작불을 피우고 옷을 말리고 있는데 개경이 함락되어 적도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왕의 일행은 잠시 쉴 겨를도 없이 또 피난 길을 재촉했다.
“연을 치우고 말을 가져오너라.”
임금은 행차 길을 서두르기 위하여 연을 버리고 말로 갈아탔다.
개경이 함락된 것은 왕이 개경을 떠난지 5일 만이었고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넌지 한달만의 일이었다.
간신배 김용
공민왕은 피난을 가면서 김용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였다. 김용은 위기에 처한 개경을 방어하고 홍건적의 공격을 받아 흩어져 있는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물리치도록 명을 받았다. 공민왕은 왕자의 신분으로 12살 때 원나라에 불려가서 10년 동안 볼모로 지내는 동안 김용이 자신을 지켜주었던 측근이었기에 믿고 중책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김용은 왕이 기대하는 만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공민왕은 즉위 초 개혁 정책을 펴고자 하였으니 조정은 온통 부원배들이 판을 치고 있었으므로 주위에 믿을 신하가 없었다. 그래서 요직에 자신의 측근 앉혔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신하들은 공민왕과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공민왕은 측근 신하들을 중용하여서 과거 무신정권 이래로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고려의 자주권을 확립하는 정책을 펴고자 하였으나 그들 측근 신하들은 공민왕의 뜻과는 달리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하여 공민왕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는 공민왕이 추구하는 개혁은 뒷전이었다. 그들은 왕의 신임을 디딤돌로 삼아서 새로운 권력의 주역이 되고자, 공민왕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과 가까운 인사를 요직에 앉혀서 새로운 문제거리를 만들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공민왕이 고려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원나라 시절에 업신여김을 당하며 지내던 어린왕자, 왕기(공민왕의 아명)였다. 힘없고 철모르는 왕기가 고려왕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보살핌이 없었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보살피던 아이가 왕이 되었으니 그 왕이 누리는 권력을 자신들도 나누어 가져도 무방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왕의 전권에 속하는 인사권도 자신들이 마음대로 행사했고 왕 앞에서 함부로 무례한 행동을 했다. 그 대표적인 인사가 조일신이었고 그리고 김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