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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6-22 16:21

  • 오피니언 > 윤만보 작가 이방실 장군이야기

이방실장군이야기 8

기사입력 2025-11-1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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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만보 작가
전 경찰서장(총경)

2만의 군사가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해댔다. 홍건적은 침공 이래 이렇게 대군이 한꺼번에 쳐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적은 고려군이 쳐들어오자 성내에 포로로 잡혀있는 고려군을 죽였는데 그 수가 1만에 이르러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고려군은 동료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했다. 마침내 적은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고려군에 당하지 못하고 결국은 성에서 쫓겨났다. 고려군은 성을 빠져나가는 적을 기다렸다가 척살하였는데 적은 수천의 전사자를 냈고 얼마나 다급하였던지 쫓겨가면서 그들끼리 밟혀서 죽은 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안우, 이방실의 군사는 적들을 압록강변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쫓기던 자들이 용강, 함종에 이르러 이곳에 주둔해있는 잔당과 힘을 합하여 공세를 취하니 전세가 역전이 되었다. 고려군은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었는데 이때 동북면천호(동북면 천호) 정신계가 군사 1000명을 이끌고 와서 도우고 장수 장륜이 용주 등지에 흩어져있는 군사를 모아서 합세하여 죽기살기로 싸우니 마침내 적은 물러갔다. 적은 이 전투에서 군사 2만을 잃고 원수 심자와 황지선이 사로 잡히니 전의를 잃고 도주하였다. 이방실은 정예 기병 1000기로서 도주하는 적들을 쫓았고 뒤이어 안우 김득배 김어진이 군사를 몰아 공격을 하니 적은 달아나기가 바빴다.

압록강까지 내몰린 적은 얼음이 풀리기 시작한 강을 건너다 수천명이 강에 빠져 죽기도 하여 겨우 살아남은 자가 300여명에 불과하였다. 음력 2월 중순 봄이 찾아오는 때에 고려군은 홍건적을 완전히 강 건너로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이방실이 이끄는 고려군사는 적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하여 다시 압록강 너머로 쫓겨갈 때까지 압록강과 서경을 오가면서 무려 아홉 차례나 대규모 전투를 치루었다.

 

한편 안우 이방실의 군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에 서북면도원수로 임명되어 서경을 구하러 왔던 이암은 서경에서 철수하여 황주에 진을 치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홍건적은 서경을 함락한 후 한발짝도 남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전투는 모두 서경 이북에서 이루어졌고 적을 격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경은 안전할 수 있었다.

 

왕은 홍건적을 모두 압록강 밖으로 쫓아내고 개선한 장수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방실은 공을 인정받아서 추성협보공신에 추밀원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선물로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이 모습을 보고 왕비 노국공주가 물었다. “전하께서 어찌 지극히 아끼는 보배를 남에게 주시나이까?”

이에 공민왕은 우리 종묘 사직이 폐허가 되지 않고 백성들이 어육이 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이요. 내가 살을 내어줘도 이 공을 보답할 수 없는데 이러한 보물쯤이야 어찌 아깝다고 하겠소라고 답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2차 홍건적 침입 (개경 함락)

 

1361년 공민왕 910, 막겨울이 시작되는 때였다. 홍건적이 또 한번 대규모로 고려를 침공해왔다. 이른바 2차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이들은 원나라의 제 2수도 상도까지 공격해 들어갔다가 쫓겨서 후퇴하던 중에 고려를 침범한 것이었다. 반성, 사유, 관선생이 이끄는 10만의 대규모 군사였다. 그들은 100만의 대군이라고 뻥을 치면서 고려를 협박했다.

우리는 100만의 대군이다. 우리의 앞에 나서는 자는 모두 죽음 뿐이다. 살려고 하는 자는 모두 항복하라. 고려왕이라 해도 우리 앞에 무릎을 꿇으면 목숨을 살려줄 것이다.”

 

1차 침입으로 혼이 난 고려군은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를 했다. 1차 전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 안우를 총사령관 격인 상원수로 임명하고 이방실을 서북면 도지휘사로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배치하였다.

이방실은 청천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진을 쳤다. 또한 2차 방어선으로 개경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절영에다 목책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방어선 밖의 주민과 식량, 물자들을 절령 이남으로 이동시켰다.

 

고려군이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 이때 강계지방 독로강(원나라와 접경지역)만호 박의가 난을 일으키는 일이 벌어졌다. 박의는 1차 홍건적 퇴치에 자신이 공신으로 책봉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던 것이다. 왕은 형부상서 김진으로 하여금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김진은 문신이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반란군에 밀렸던 것인데 이때 왕은 동북면상만호 이성계로 하여금 이를 진압토록 명하였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이 죽자 27세 젊은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이성계 가문이 거느리는 가병들은 용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성계는 가병 1500명을 데리고 나가서 박의를 죽이고 난을 진압했다. 이를 계기로 변방의 장수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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