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장 김양자
음식은 소중하다. 음식물의 소중함을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를 불교에서 배우게 되는데 승려들의 식사시간이다. 승려들은 식사부터 식후 뒤처리를 하는 과정의 일목요연하다. 음식섭취 하는 동안 작은 찌끼까지도 발생하지 않도록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김치 조각 하나를 남겨둔다. 그릇이 비게 되면 마실 만큼의 물을 붓는다. 남겨두었던 김치 조각으로 바리에 붙어있는 미세한 찌끼를 한데 모은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신다. 일반적 생각으로 그것을 어떻게 마시냐고 역정을 내고 얼굴을 붉힐 수 있다. 닦아 모은 바리 속의 물은 원래 물 색깔과 조금 다르다. 그 물을 마신 다음 바리를 자신의 보로 닦는다. 닦은 바리는 보관함에 정리를 하면 식사시간이 마쳐진다. 단순히 식사예절을 뛰어넘어 식사예법과 바리를 닦아 정리하는 것도 수련이고 수행이며 더불어 소중함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승려들의 식사예법과 달리 방문한 불자들의 경우에도 식사예절은 비슷하다. 어느 날 설거지 하는 것을 지켜본 대승께서 그릇에 붙어 있던 밥알을 흘러 보내는 것을 보고 밥알을 하나씩 주워 씻은 다음 그것을 먹어버린다. 그 후 밥알 하나라도 허투루 버리는 것은 불심에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게 되는 것에 합당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밥 먹는 것을 왜 공양이라고 하는 것일까. 밥을 먹게 되기까지 식재료를 준비하고 준비된 재료를 다듬고 다듬은 것을 요리하여 먹을 수 있기까지 그 과정의 중요성과 고마움뿐 아니라 음식물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를 몸소 간직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은 모두가 수련이며 깨달음이며 자신을 온전히 불심 속에서 부처의 뜻을 이행하려는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밥알 하나하나가 생명의 원천을 위한 소중한 것이므로 예사롭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며 버리는 것에도 자책하는 마음이 없으면 연옥으로 가는 업보를 쌓는 것이라고도 한다. 소중함이 결여될 때 먹는 것은 자신을 위한 덕의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산업의 급성장과 발전이 문명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에 반하여 감사와 고마움은 점점 결여되어 간다. 문명의 최첨단 시대에 살면서 편리를 누리지만 나의 할 일을 내가 하는 것을 타인에게 의존해 버린다. 나의 편리를 위하여 금전적인 넉넉함만 소유하고 있으면 된다. 승려들이 보여준 발우공양을 따라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의미를 품고 있다면 주변의 흐트러짐, 너저분함 가득했던, 나를 위한 이기적 욕심들이 정리가 되고 다듬어질 것이다. 곧 소실된 사랑의 회복이다.
승려가 승복을 입은 채로 자신의 종교가 아닌 타 종교 수련원에 간다. 그곳에서 사제들의 식사법을 배운다. 그들은 식사 후에 자신의 식사도구를 자신이 세척 후 식사할 자리에 배열해 둔다. 담당자는 배열된 것을 확인하고 식사준비를 한다. 숫자이상의 음식을 만들지 않아 절약을 실천하는 것이다. 발우공양이나 배열된 식사도구를 확인하고 음식 준비하는 것에서 음식의 소중함을 배우는 것이다. 실천적인 소통의 교류가 사랑과 신뢰로 바탕이 될 때 심신의 정화와 함께 삶의 지나친 탐심은 사라지고 공양의 미덕도 절제력도 소중함도 자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