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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지방 독립물결 기폭제, 연개장터 의거를 돌아보다

연개장터를 핵(核)으로 경남지방에 의거 확산

기사입력 2023-04-1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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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호에 이어

 

연개장은 마산 부산 등지의 해산물과 함안·창녕·밀양·영산·의령 등의 농산물이 교역하는 곳으로 인원 동원이 비교적 용이하고 일본 경찰의 주의가 다소 느긋한 곳이었기 때문에 수천 군중을 동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화적인 시위를 할 수 있어 경남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봉화(烽火): 예전에, 나라의 큰 난리가 있을 때, 신호로 올리는 불을 이르던 말)를 높이 들 수 있었다.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 세워진 독립 기념비의 내용을 전재(全載 : 문학 작품이나 논문 등을 출판물에 여러 번 나누어서 싣지 않고 전체의 글을 한꺼번에 실음)하면 다음과 같다.

 

2) 31독립운동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

“1910829일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민족의 자유는 여지없이 짓밟혀 삼천리강산은 마치 감옥처럼 변하고 이천만 동포는 누구나 다 포로가 된 고초를 겪게 되었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자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수많은 지사 선열은 천재일우의 호기라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가일층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1931일 기미 만세 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폭발하였으니 이것은 한일합병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였다.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 천지진동하는 맹렬한 기세는 적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 고장에서도 그 무서운 일제의 폭압을 박차고 만세 운동이 일어났으므로 거룩한 선열들을 추모하여 3·1정신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운다.

이곳은 낙동강변 모산하에 위치하여 1897년에 이령 교회가 창설되고 1904년에 경명학교가 설립된 평화스러운 문화촌이다.

기미년 32일 고종황제의 인산 봉행식에 참여한 지방유지 김세민, 여봉준, 김주현, 윤기선, 황병민, 하갑수, 한세호, 정영실, 김홍찬, 김갑일, 황경수, 김차선, 안수원, 김정오는 서울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직접 참관하고 돌아와 36일 새말 예배당에서 김두량, 김수감, 이만웅, 여경천, 곽진수, 손학봉, 김금석, 임경환, 엄태경, 김만옥, 김윤석, 김성추, 황출이, 배양전, 박기우, 구제남, 황마리아, 이귀애, 김혜림, 이선옥, 김혜숙, 김장덕, 곽성복, 임순우, 엄또일, 윤봉수, 진익이, 김순과 함께 모여서 39일 연개 장날에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그 대책 위원으로 윤기선, 여봉준, 곽성복, 김정오, 김주현을 선정 일임하여 3일간 비밀리에 모든 대책을 세우다.

39일 정오 연개장터에서 남녀노소 수천 군중이 총궐기하여 대회장 김세민의 개회사에 이어 유광도의 격려 연설, 김정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경명 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너무나 감격에 복받쳐 울기도 하고 산하 각 마을을 순회한 후 석양에 산회하였다.

당일 행렬에 앞장선 분은 위에 기명한 이외에 문장환, 박쾌일, 하숙찬, 김도근, 김도석, 김경돈, 김찬욱, 차서식, 구사문, 김영수, 김성요, 배희도, 김우천, 김용이, 김우진, 이유근, 임용이, 곽종철, 이상안, 조은성, 김백은, 윤봉인, 양성만, 윤한경, 구찬문, 구역조, 윤봉기, 차학련, 차만갑, 한명수, 전수업, 이덕호, 황진규, 임제한, 김학률, 김영정외 지방유지 다수이고 학생은 하갑조, 박종실, 윤효준, 차용학, 문삼갑, 배대위, 구주현, 김삼백 등 전원이다.

일후 칠원읍과 영산읍에 연락하여 칠원의 손종일, 엄주신, 박순익, 김성협, 영산의 김추은, 장진수, 구중회 등이 만세를 주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당시 삼칠 방면은 마산경찰서 칠원주재소 관할이므로 뒤늦게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윤기선, 여봉준, 한세호 내외분들의 정성 어린 노력으로 관련자 다수가 구출되고 김세민 내외분은 수감자와 그 가족 생계비 조달을 위하여 많은 곤욕을 당하였다.

김두량 정영실 칠원읍 만세 사건 주모자로 마산 감옥에서 각 1, 김정오는 서울 악학전문학교 재학 중 학생 주모자로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간, 임학찬은 창신학교 재직 중 기밀 연락 관계로 서울 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고 김순은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재학 중 독립신문 발행에 가담하여 16개월의 형을 받았으며 세브란스의전 학생 배동석은 전국 학생 주모자로 2년의 형을 받고 심한 고문으로 서울 감옥에서 득병 서거하다.

당시 이 빛나는 의거에 주동이었던 김정오, 김 순 두 선생의 산 증언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신 분 중 생존하신 이갑성 선생의 휘호를 이 비에 새기게 됨을 감명 깊게 생각하오며 가신 어른들의 애국 충혼이 길이길이 조국을 수호하시리다.

 

서기 1976815

 

광복 313·1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위원회 위원장 윤효량 ㆍ조영제 근지

 

위대한 사랑의 햇불이여!

적의 총검 앞에서도

조국 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짖던

그 의기 그 순정

죽음을 초월한

그날의 애국 애족의

뜨거운 충정은

우리 겨레의 핏줄 속에

영원히 이어서 살아있다.

 

박목월(朴木月)

 

3) 함안 및 경남 31운동사에 기록된 애국지사의 행적

국가독립유공자 유족회 회장인 안인호(安寅鎬)함안 3·1독립운동사 편찬 자료(1982)에서 회고 컨데 독립 유공자 유족회 공적 조사에 착수한 것은 어언 십여 년이 지났으나 60여 년 전의 의거인데다가 간악한 일제는 식민지 폭정을 은폐하기 위하여 증거 서류를 소각(燒却 : 불에 태워 버림) 또는 파훼(破毁 : 깨뜨려 헐어 버림)하였고, 해방 후의 무질서에 이어 625 동란으로 인한 해당 문서의 소실 분실 등 악 조건으로 말미암아 자료 수집에 많은 애로와 난관에 봉착하였으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추적하였다. 그 결과 대구 복심법원(현 고등법원)공소(公訴 : 검사가 어떤 형사사건에 대하여 법원에 재판을 청구하는 일)한 판결문과 집행원부를 찾게 되었으며 부산 지방법원과 마산지원의 판결문은 6·25 때 대부분 분실되어 입수치 못한 반면 함안군 각 면사무소에 영구 보존된 일제강점기의 범죄인 명부 중 함안· 군북· 대산· 법수 4개면 것은 이 역시 6·25 때 없어졌으나 가야·여항·산인·칠원·칠서·칠북 6개 읍면의 것은 다행히 보존되어 있어 충분치 못하나 공적을 대략 발굴하여 국가 독립 유공자 신청에 일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로 기록되어 있다.

전기(前期) 자료에 의하면 칠북 연개 의거 지사 명단에서 본적지 면사무소 범죄인 명부에 수형(受刑 : 죄인이 형벌을 받음) 사실은 기록되어 있으나 판결문이 발견되지 못한 지사로 칠북 운서리 윤사문(尹士交)지사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1919.5.8 재판 확정), 칠북면 이령리 김세민 지사의 사촌인 김두량(金斗量)지사도 같은 죄목으로 징역 6(1919.5.8 재판 확정)로 되어있다.

부산 경남 3·1운동사에 칠북면 이령리 김정오(金正誤)지사는 경성약업전문학교 본과 1년 재학시 3·1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가 귀향하여 동지들과 39일 연개 장날을 기하여 의거하기로 했다. 당일 군중에게 선언문과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315일 주모자로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외의 비문에 거명된 지사들이 유공 행적을 기록상으로 밝히지 못함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4) 경남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의거

부산경남 3·1독립운동사기록에 따르면 각 도별로 제일 처음 3·1 운동이 일어난 일자는 31일에 서울· 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도, 33일 충청남도· 경기도, 35일 전라북도, 39일 경상북도, 310일 강원도· 함경북도· 전라남도, 311일 동래의거를 필두로 경상남도의 만세운동은 도내로 번져 313일 영산 밀양에서, 314일에는 창녕·통영에서 일어났고 점차로 도내 각 군··면으로 확대되었다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칠북 연개장날 의거가 부산 경남3·1독립 운동사를 편찬할 때 불행하게 기록이 누락되어 생긴 해석이다.

39일 칠북 연개장터에서 일천여 명의 군중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면서 각 마을을 순회한 후 석양 무렵에 자진하여 해산하였으므로 사상자가 없고 옥고를 치른 사람이 없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칠북 연개장터의거는 경남과 부산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의거임이 분명하다.

칠북 연개는 일찍이 교회가 설립되어 기독교가 뿌리내린 곳이고 경명학교가 15년 전에 개교하여 비교적 개명(開明 : 정신적이나 물질적으로 뒤떨어진 인간이 교육이나 계몽을 통하여 의식이 깨고 문화가 발달함)이 빠른 곳이며 인근 지역과 해상 및 육상 교통이 원활한 곳이므로 경남에서 제일 먼저 대대적인 의거가 일어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마산경찰서 칠원 경찰관주재소와는 거리가 멀고 비밀이 유지되어 시위는 평화적으로 매듭지었으나, 다음날 정보를 입수한 왜경은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위사실을 부인하고 축소하여 연행자는 모두 훈방되었다.

조선헌병대사령부의 기록에 “310일경부터 함안군 칠원 기독교 신도들은 구마산 신도와 기맥을 통하여 장날을 이용하여 소요를 일으키려 하였다. 소관 주재소 경찰관은 이를 탐지하고, 주모자로 지목되는 자에 대하여 엄중한 설유를 가한 결과 무사할 수 있었다로 기록되어 있다.

39일 연개 장날 만세 운동을 필두(筆頭 : 여럿을 차례대로 벌여 적거나 말할 때의 맨 처음의 것)로 하여 312일 함안군 대산면 평림 장날 의거가 일어났으며 313일 영산·밀양·통영의거, 314일 의령의거, 315일 신반의거 316일 지정의거, 317일 칠곡의거, 318일 진주·정촌·삼가 의거, 319일 함안읍·합천의거, 320일 군북, 대병, 구만의거가 일어났다.

연개장터를 핵()으로 하여 경남지방에 의거가 확산되었으므로 칠북 연개장터의거는 경남 31운동의 기폭제(起爆制)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는 31운동 후에 칠북 연개장을 폐쇄하였고 가게를 헐었으며 일본 사람만 드나드는 기생 술집만 하나 남겨두었다.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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