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유
전 함안군기획감사실장
전 함안군 의원
기억하기도 싫은 민족의 비극 6.25 전쟁, 그 전쟁이 발생한 지도 올해로 70년이 된다.
근 반세기의 세월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그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고통을 주고 있다. 우리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잠시 멈추었을 뿐이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지난 역사를 보면 대부분 위정자들의 과욕에서 비롯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권력자들은 그저 게임 놀이인데, 이에 반하여 민초(民草)는 늘 죽음 앞에 선다.
민간인 희생자 100만 명, 군인 전사자 20만 명, 본인은 물론 남은 유족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 6.25 전쟁도 북한 김일성 한 사람의 야욕에서 시작되었다 하겠다.
해방, 새 세상을 위하여 몸을 받치려다 꽃다운 나이에 꿈도 한번 펼쳐 보지도 못하고 같은 민족의 손에 이념의 제물이 된 한 청년의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한다.
1950년 7월 경남 마산시에 소재한 마산 형무소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기존 재소자들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의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예비 검속되어 트럭에 실러 오고 있었다.
형무소는 수용 불능 상태까지 되어 건물은 물론이고, 마당 심지어 화장실 입구까지 망석을 깔고 거기 수용되었다. 한 마디로 아비규한이였다.
시작은 7월 14일 3시 200명이 넘는 죄수를 손에 수갑을 채우고 40명에서 50명 정도를 트럭에 실고 마산항(馬山港)으로 이동하였다.
마산항에 도착하여 대기 중인 LST에(수륙양용 수송선) 승선시켜 구산면 굉이(갈메기) 바다로 이동하여 무장한 군인들이 손과 발을 영광굴비 묶듯 끈으로 묶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쏜다. 눈이 충혈된 군인들은 살기에 가득하고 있어, 모두가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달하자 군인들은 백정으로 변하여 모두 바다에 처넣고 물 위로 올라오는 사람을 항하여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마산 형무소 재소자만 1천 명이 넘는 사람이 수장되었다.
차마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천인공노(天人共怒) 할 일이다.
이 사건도 재소자와 같이 수장될 뿐 했는데, 뒤에 사건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불행 중 다행으로 생존자가 있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생존자는 굉이 바다의 인근에 살든 분으로 당일 총탄이 묶은 노승을 풀어 주어 물밑을 잠수하여 살아났다고 한다. 사건 이후 고향땅에는 살기가 무서워서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차제에 역사에 묻혀지고 있는 국민 보도연맹이란 무엇이며, 형무소 좌익 수감자와 국민보도 연맹원(國民報道聯盟員) 학살사건의 시말(始末)은 무엇인가?
관련 증언들을 토대로 하고, 내 작은 지식을 총동원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또한 후세에 전하는 역사기록에 조금이라도 보탬 될까 하는 희망으로 …
국민 보도연맹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보련)은 1949년 3월 21일 서울 창립 본부를 두고 창립 처음에는 서울시 경찰국에 임시 사무실을 설치했으며 이후 미군 CIC(전투 정보 지휘소) 본부 요원 클럽 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본부 조직은 상위 조직으로 고문(대법원장, 국회의장, 검찰총장)과 총재 (내무부 장관.) 참사관(서울 고검장 등)이 있었고, 행정부로 사무총국 아래에 조사, 선전, 조직, 재정 보호국이 설치됐다.
지방의 경우 구, 군, 동, 면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정 구역에 하부조직이 결성되었으며 회원 10명으로 세포조직이 만들어졌다.
보련(報聯)의 주된 목적은 좌익 활동 전력이 있는 자들을 전향 또는 관리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정부가 조직한 관변(官邊)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성격이나 구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관계자들이 자료를 폐기한 것으로 사료된다.
형무소 좌익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집단 학살사건의 시말(始末}는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생되었을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추정해 보면 1949년 말 보련 가입자 수가 30만에 달했고, 희생자 단체 주장에 의하면 최소 20만 명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윈회 가 파악한 숫자는 5천여 명. 나는 여러 가지 정보로 추정해 보면 몇 만 명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마산 형무소만 하더라도 희생자가 천명이 넘는다.
집단 학살은 왜 일어났나? 전쟁 당시 주한 미대사간 2등 서기관 도날드 맥도날드가 50년 7월 11일 국무부에 보낸 “인민군점령지역의 상황보고서"가 단초가 된 것 같다.
"그대로 둬선 안 된다"
보고서 내용은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되고 3일 후인 6월 28일 서울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위원장 이승엽) 행정기관과 경찰 시설을 접수한 후 동과 반으로 하부조직을 만들었다. 곧이어 서울 용산구 서빙고 자리에 인민재판소 설치(책임자, 정백) 되고 경찰, 군인, 대한청년단 간부 등에 즉결 처형에 들어갔다.
보고서에서 서울에서 인민원회가 이처럼 빨리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 보도연맹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보고서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 혐의자들이 보련원과 함께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뒤 인민위원회 구성 등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들이 형무소 좌익 수감자와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에 명분과 빌미를 제공한 것 같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던 이로 인하여 유족들이 격은 고통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찍히고, 연좌죄(連坐罪) 묶어 죽음보다 더한 교통을 받았다. 내가 아는 지인(지人)은 형(兄)은 대한청년단으로 야산대(좌익 행동대)의 총에 맞아 죽고, 장인은 좌익 활동을 하다가 형무소 복역 중 국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민초(民草였다. 6.25 전쟁은 약소민족의 설움이고 민족의 비극이다. 지난 역사를 교훈으로 부강한 나라, 전쟁이 없는 나라, 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억울하게 가신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내가 사건의 당사자이었다면 그때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하였을까?
역사는 반드시 객관성과 균형 있는 시각으로 진실만을 기록하고 보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후손들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사건 당시의 환경이 중요하다. 전쟁은 극한 상황이다 평소의 시각으로 판단하면 큰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과거사(과거史) 정리 없이는 미래는 없다."
모두들 깊게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