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군 가야읍 상검길 22-45, 22-41번지에 위치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30호 충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평민을 주축으로 한 의병을 이끌고 직접 진두지휘하며 전사하신 이령 의병장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건립한 건물로 충의 사상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충순당은 건립연대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나타나는 우리나라 근대 한옥의 이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인근 동산정과 함께 함안지역 지방 건축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인정되어 2011년 4월 28일 경상남도 문화재 제530호로 지정되었다.
이령 의병장은 1541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에서 출생,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며 갈천선생(葛天仙生) 밑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자신의 영달을 좋지 않고 오직 몸과 마음을 닭고 학업 수양에 전념하였고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래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김해성으로 달려가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을 도왔다.
그의 사람됨과 충성심, 정열의 웅장함을 보고 성의 요새인 동문 수문장을 맡아 지키게 하였다. 이때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적이 김해성을 침공하였다.
이령 의병장은 의병들을 독려하여 많은 왜적을 참살하여 1차 공격을 방어 하였으나 대규모 2차 공격이 시작되자 김해부사는 군민과 더불어 퇴각했다가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그러나 이령 의병장은 ‘나의 신조가 충의(忠義)를 준수하여 왔거늘 어찌 국가의 존망을 목전에 두고 일신만을 생각하고 퇴각할수 있겠는가?’ 하고는 결사 보국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령 의병장은 주변 사람들의 퇴각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가지 싸웠다. 그와 함께 참전한 둘째 아들 이명화에게 피묻은 적삼을 벗어주면서 장차 이것으로 장사지내라 하고 군병을 독려하여 분전하였으나 많은 적을 상대하기에는 의병들의 수가 너무 적어 결국 전사하게 되니 김해성이 함락되었다.
전쟁후 시신을 찾지 못하여 아들에게 맡긴 피 묻은 적삼을 놓고 초혼장을 지냈는데 선생의 묘소는 함안면 대산리 동지산에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수백년 동안 전국의 유림들과 후손들이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고 그 결과 조정에서 후손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복호를 명하고 1869년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880년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1885년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 되었다. 충순당 정려각은 주변에 담장을 둘러 경계를 짓고, 횟가루로 다진 바닥 위에 비각(정면3칸)을 세워 단청을 하였다. 내부에는 이령에게 ‘통훈대부 이조참의’를 추증했다는 나무판이 외부의 처마 밑에는 성재허전(惺齋許傳)이 찬술한 [충순당 정려기(忠順堂旌閭記)]가 걸려있다.
함안지역민의 충의를 선양할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정려 건축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앞으로 지역 의병사를 발굴 조사하여 후손에게 물러주는 지혜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김경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