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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3-09-21 15:45

  • 오피니언 > 고분군

자연인

기사입력 2023-01-0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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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벗어나 숲속에서, 혹은 산자락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등산로와 거리가 먼 곳에서, 단순히 일탈을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을 벗어난 삶의 또 다른 방법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것이 대세인 요즘, 그들을 자연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특정 종교에 심취하거나 종교적인 색깔을 지닌 것도 아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과의 이해 충돌이 만들어 준 탈출구로 선택한 것도 아니다. 세속의 삶, 가족과 가정과 직장과 사회생활을 길게 혹은 짧게 사는 동안 가끔은 주어진 세속의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갈등을 겪으며 고뇌와 번민의 시간 속에서 남몰래 방황하기도 하는 동안 인간이라는, 인간만이 겪게 되는 것들과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해주는 대뇌피질이 작동 시켜주었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시계추의 반복되는 흔들림 속에서 주어진 시간대로 지내기만 했던 것들, 잠시 멈춤의 신호등을 잡으려고 했으나 추는 제 본연의 임무만 충실할 뿐 멈춤을 주지 않았던 것들, 신에 나에게 부여한 시간을 묶어두려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라고도 하겠지만 자연에 주어진 것이 나의 것이고 나는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확신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여기면 된다. 반복의 허울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삶의 본질에 대하여 사색의 터를 스스로 고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택한 자연인의 삶과 달리 강제적인 탈출구를 찾아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기울기가 심한 때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며 사회의 모습이라 하고 싶다. 바른 행동과 생각, 정의로운 언행으로 보듬어 주기와 이해, 높고 낮음의 계급적 의식보다 모두의 평등, 지위의 하나의 껍데기, 그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어 그대들이 행복하고, 모두 하나 되어가는 것에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이 자연인의 본래 모습이며 태초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넉넉하면 나누어 주고 풍족하면 베풀고 넘치며 도와주는, 두 개가 많은 것 같아 하나를 건네고 한쪽이라도 만족하여 나누어 먹으려는 지난날 본심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홉 개나 있으면서도 하나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열 개로 채우려는 것은 아귀라는 괴물만이 할 수 있는 추한 모습이다. 일상에 충실한 자의 본능적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잔잔히 흐르는 물과 같은 삶의 모습에 심술을 부리는 것은 의미도 가치도 없는 질투를 만들어 재를 뿌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한 해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새해가 노크를 하면 지난 시간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들을 손꼽아 보게 된다. 자연적인 삶이 주었던 것을 진실함으로 감사하며 만족해 왔는지, 아쉬움만 쟁여두었는지 되돌아보는 동안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평탄함을 유지하는 것은 지나간 시간들의 흔적에서 방황하기보다 다음 날이 주는 희망적인 사고가 주는 선물이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배려의 부족과 양보의 미덕이 부족했다면 한 겹 더 두터워진 나이테를 바라보자. 자연인이 자연 속 불편함이 산재한 곳에서도 편안과 평탄함을 유지하는 방법을 지녀보자. 자연 속에서 살지 못해도 자연의 혜택을 누리듯 살면 감사의 삶은 나의 것이 된다.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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