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원(논설위원)
군북출신/전 장유초 교장
“어딜 가나 개ㆍ고양이… 미치겠어요.” 동물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의 마음을 소개한 어느 신문 기사 제목이다.
“저는 굶어도 고양이 밥은 굶길 수 없죠.”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의 모습을 소개한 어느 신문 기사다.
누가 봐도 후자가 착한 사람으로 보인다. 불쌍한 길고양이를 먹여주고 보살펴 주는 천사 같은 동물 사랑에 존경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전자는 어떻나? 동물을 멸시ㆍ천대하고 오직 자신의 안일만 생각하는 인정 없는 사람으로 머리에 남는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지난 달 울산의 한 아파트 CCTV에서 목줄 없는 개가 8살 어린이의 목과 팔을 공격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개의 공격을 받은 어린이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개의 공격에 넘어졌고 이어 2분여의 시간동안 공격은 계속됐다. 현장을 목격한 택배 기사가 가까스로 어린이를 구출했지만 목과 팔은 상처투성이였다. “개가 물어뜯는 게 아니고 잡아먹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택배기사는 말한다. 이 정도면 개가 아니고 맹수다. 이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다. 개가 살아가려면 사람이 희생돼야 하고, 사람이 살아가려면 개가 없어져야 해결된다. 목줄 없는 개와 사람은 공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길고양이의 폐해(弊害)를 적어본다. 필자는 단독 주택에 거주한다. 저녁때면 수거용 쓰레기봉투를 대문 밖에 내 놓는다. 그런데 봉투 속에 고기 뼈 등 고양이 먹잇감이 들어 있으면 귀신같이 안다. 고양이는 쓰레기봉투를 찢어 그 속에 든 먹이를 밤새도록 찾아 먹는다. 이튿날이면 봉투속의 쓰레기는 길바닥에 흩어지고 찢어진 봉투만 길가에 남아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창고, 지하실, 보일러실 할 것 없이 들어갈 틈만 있으면 고양이 보금자리다. 심하면 그 곳에서 새끼까지 친다. 들어가면 똥오줌 냄새가 진동한다. 쫓아내도 좁은 틈새에 숨어버린다. 사람과 숨바꼭질을 하면 그 약삭빠른 행동에 당해낼 재간이 없다. 아침에 뜰에 나가면 싸놓은 고양이 똥은 예사다. 그것도 잔디 같은 좋은 자리만 찾아서 실례를 한다. 그야말로 고양이와의 전쟁이다.
다시 신문 기사를 보자. 동물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단순히 동물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동물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정신과 질환이 있는데도 이것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소연 하고 있다. “다 큰 어른이 뭐가 무섭냐?”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에게 왜 과민 반응이냐?”는 편견도 문제다. 선천적 동물 공포증도 있지만 주로 어렸을 적에 동물에게 물리는 등 동물 관련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신문에서는 말한다.
이것을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필자는 어릴 때 개에 두 번 물렸다. 골목길을 쫓아가다 뒤에서 덤비는 개의 공격을 받은 것이 원인이다. 그 뒤로 개는 공포의 대상이다. 개만 보면 개에서 눈을 떼지 못 한다. 개가 접근하면 몇 번이고 목줄을 당겨 달라고 부탁을 하고 지나간다. 지나고 나서도 안심을 못한다. 이젠 뒤에서 덤빌까 봐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개에 물리고 50년이 지났다. 물린 상처는 흔적도 없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는 지금까지 남아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힌다.
길고양이는 사람을 물지는 않는다. 불편한 이면에 사람이 느끼는 이점(利點)도 있다. 무엇보다 집에 쥐가 없는 것이 가장 큰 혜택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일부러 고양이를 키웠지 않았나. 물론 개도 키웠다. 그 때의 개는 도둑을 지키고 가축으로서의 경제적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개는 ‘애완견’의 역할 외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 주인의 사랑만큼 개도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남에게까지 충성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남까지 우리 개를 좋아해 주길 바랄 수 없다. 오히려 남에겐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애완견 주인은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