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탈환
진주를 건너는 샌드백 다리는 26일, 09.00시 완성되었다. 차량들이 먼저 건넜다. 공병이 18,000개의 샌드백으로 완성했다.
사단장은 명령했다. 돌빈특수임무대는 목표 제한 없이 내륙 방향인 진주➝함양➝남원➝공주➝익산쪽으로 밀어붙여라. 35연대는 첨병인 돌빈임무대를 뒤따라갔다. 톨맨임무대는 또 다른 루트 하동을 경유 남원과 군산까지 밀어붙인다. 임무대는 공격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준비와 재편성에 하루를 보냈다. 24연대가 뒤따라갔다. 24연대 패트롤은 적이 보이지 않았으며, 9월 26일, 사천과 진주는 완전하게 확보되었다. 이후 톨맨임무대는 서쪽으로 더 멀리 밀어붙이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돌빈임무대의 탱크중대와 1개 보병중대는 탱크 데크 위에 탄 채 9월 26일, 06.00시 이동을 시작했다. 선두탱크는 10.00시경 진주 서북쪽 10마일 지점의 지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책가방 형태의 지뢰였으며 위력이 대단하고, 탱크병 몇 명이 크게 다쳤다. 공병이 도로를 말끔히 청소했다.
적군은 능선을 걸터앉은 길에 매복한 채 전진을 방해했다. 후퇴하는 적병들이 교량을 파괴하고 매설한 지뢰밭을 경무기로 엄호하고 있었다. 연락비행기가 공중에 올라 전진부대의 전방 상황을 알려주었으며 첨병이 나아가는 전방의 교량 폭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전투기를 불렀다. 전진 부대는 저녁시간에 오송리 남쪽의 1094-1374 지역 1마일 지점까지 전진했다.
35연대의 축소된 1대대는 진격을 뒤따라오던 돌빈임무대와 합동으로 진주에서 서북쪽으로 밀어붙였다. 남은 대대원들과 차륜들이 뒤따라 이동했다. 연대의 모든 차량들은 진주 남강 통과를 완료했으며 2대대와 3대대는 1대대와 돌빈 임무대를 뒤따라갔다.
27연대 1대대는 남강 가까운 곳에 집결하고 9월 26일, 04.00시 남강을 도하하기 위하여 다시 이동했다. A, B중대와 다른 일부 병력들은 서쪽 둑의 교두보의 산발적 공격을 타격하기 위하여 공격용 보트를 타고 갔다. 다른 대대원들은 고립된 적의 경무기와 박격포격을 받으면서 도강을 이어가고 이룡리로 통하는 산허리에 걸터앉은 도로를 즉시 확보했다.
27연대 2대대는 산발적으로 공격해오는 마을의 적을 제압하기 위하여 뒤따랐으며 강력한 정찰대는 고립된 적을 섬멸했다. 적군 포진지를 무력화하고, 또 다른 정찰대는 도강을 위협하는 박격포를 잠재웠다. 많은 적이 죽고 150명이 포로 되었다.
공병은 적군의 거센 박격포격을 받으면서 남강의 또 다른 수중보를 완료했다. 적군은 65공병의 샌드백 다리 공사를 방해했다. 600 보폭의 남강에 1,900톤의 흙과 38,000개의 샌드백이 소요되었다. 레이션과 탄약 도하가 시급하며 무장한 2척의 페리호를 급조한 후 3대대가 강 동쪽 둑을 지키는 가운데 장비와 병력을 도하했다.
11군단장 소장 콜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진주 입성을 완료함에 축하한다. 빠른 시간 안에 적을 완전하게 축출하라. 기필코 달성하라. 모든 사령관들에게 다시 한 번 축하를 보낸다.” 달력은 진주를 빼앗긴 지 56일 만인 1950년 9월 26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군산으로 진격
부실한 다리는 어두워지기 전에 통과를 완료하고 돌빈 특수임무는 27일, 08.00시 이동 준비 완료되고 드디어 최후의 목적지 군산을 향하여 진격이 시작되었다. 지뢰, 무너진 다리, 적군의 강력한 저항을 모두 물리치고 적은 해머에 맞은 듯 충격과 혼란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며, 6~8대의 탄약 차량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비행기는 능선에 걸터앉을 길 변두리의 적 진지에 네이팜 탄, 로켓을 발사하여 선발대를 지원했으며, 병력들은 함양 북동쪽 5마일 지역의 길 교차로(수동3거리)에 이르고 야영했다. 공병들은 밤새워 부서진 다리 옆으로 바이패스를 만들고 자동차가 통과했다.
35연대 2대대와 3대대의 차량 이동 병력들은 1대대를 뒤따라 돌빈 임무대를 바짝 따라 긴 축을 이루면서 따라갔다.
진주와 사천 간의 진지에서 차단되었던 24연대는 9월 27일, 10.00시 또 다른 루트인 진주-하동-구례-남원 간의 루트를 따라 진격하기 시작하고 거침없이 진격하여 톨맨임무대의 선두진군부대가 되었다. 선발대는 저항 없이 17.30시 하동에 닿았으며 진격은 계속되고 적의 저항은 없었다. 하동 북쪽에서 11명의 미군 포로가 풀려났다.
27연대 전위부대는 이령 근방에 머물고, 3대대 보병은 9월 27일, 새벽이 오기 전에 남강을 건넜다. 차륜은 페리로 강을 건너 교두보로 향했다. 강물이 불어나서 애를 먹었다. 이곳 연대는 오후에 이룡 서북쪽으로 밀어 붙였으며 진격은 빨랐고 저항은 없었다. 길가에 많은 군수 물자들이 어지러져 있었다.
9월 28일, 12.00시 한국에 파견된 필리핀 원정대 제10대대 PEFROK가 밀양에서 이동하여 25사단에 배치되고 11군단장 명령으로 사천 비행장을 보호하고 남강 동쪽 주 보급로를 패트롤하게 했다.
돌빈임무대는 9월 28일, 고립된 적을 소탕하고 부서진 다리를 우회하면서 서쪽으로 서북쪽으로 밀어붙였다. 지역민들이 우회 도로 건설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함양 서북쪽의 도로 연결 지점에서 28일, 11.00시 제23보병연대를 만났다. 적군의 장비와 보급품이 길가에 수없이 버려져 있었다. 돌빈임무부대는 정오경에 함양을 장악한 후 두 곳에서 적군 폭파조를 만났지만 돌파했다. 28일, 15.15시 남원 외곽에 이르렀다. 선두 탱크는 부대를 뒤로하고 도망가는 적의 뒤를 쫓았다. 남원에서 24연대 일부 병력과 제휴하고 87명의 미군 포로가 돌아왔다. 사단 외과군의관은 포로가 된 미군에게 특별하게 대우하고 치료한 후 사천에 주둔한 치료소로 보냈다. 모두가 영양실조와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3대대는 9월 28일, 24연대로 복귀하고 연대는 공격 중인 돌빈임무대와 재후한 후 군산으로 진격명령을 받았다. 조금 늦은 13.50시 남원의 외곽에 이르고, 비행 연락장교가 보고해 온 바대로 선두는 17.15시 도시를 벗어나 계획된 서쪽 루트로 이동했다. 적군은 21.50시 순창으로 접근하는 3대대 I와 R소대를 강력하게 공격했지만 주력부대는 21.30시 순창 시내로 진입했다.
27연대의 루트는 서북쪽의 마상리에서 이룡 쪽으로 이동하게 되어있다. 2대대는 28일, 13.00시 신기리의 도로 교차점에 이르고, 다른 두 대대는 마상리로부터 종수리를 거쳐 남쪽 루트를 타고 진주로 진격하고 현시점에 보급과 준비가 필요했다. 여기 갈라진 두 부대는 시골과 시골을 가로질러 각각 26마일과 32마일을 행군해갔으며, 진격의 축에 걸터앉은 고원 지대를 걸러내고, 지뢰밭과 파인 도로, 부서진 다리가 차량 이동을 방해했다.
35연대는 차륜 이동과 보행 이동으로 주간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으며, 돌빈임무부대 뒤를 바싹 따랐다. 적군은 보이지 않고 무모하게 후퇴하고 흐트러진 채 때로는 후위에서 어슬렁거렸다. 부대 모두가 빠르게 진격을 이어가고 적군을 제압하면서 탄약과 많은 물자를 노획했다.
돌빈임무대는 야간에 진격을 계속했다. 9월 29일, 06.00시 전주에 이르고 그곳에서 제38보병 연대를 만난 후 재정비했다. 이어 삼미리 마을에 도착하고 높은 산과 도로변에서 소화기 공격을 받았으나 탱크와 항공기가 무력화시켰다. 전라북도 장수군 금강에서 이리로 진군하라는 명령이며 적의 저항 없이 이리시에 입성했다. 도착하기 조금 전에 한 번의 적군 출몰이 모두였다. 돌빈임무대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임무를 완수했으며 4일간을 달려온 거리는 총 138마일-222km였다.
금번의 성공한 작전은 한 부대만의 공적이 아닌 팀워크의 증거이며 한 샘플이다. 탱크가 따로 놀고 보병은 각자가 행동했다면, 공병이 밤낮으로 우회도로를 건설하고 지뢰를 제거하는 도움이 없었던들 완수될 수 없었다. 고립된 적군의 맹렬한 공격을 감당하기 위하여 무게 나가는 무기를 쓸모 있게 작동하고, 항공기 지원은 감사하기엔 불충분하며, 사단의 모든 병사들은 합심하고 함께 나누는 일에 힘을 쓴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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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연대는 야간에 재보급 받고 9월 29일, 08.00시 진격을 시작했다. 3대대 선두부대는 29일, 11.30시 정읍에 도착한 후 시를 장악하고, 비행기는 산으로 도망가는 적을 무력화시켰다. 3대대 특수임무대는 지원 온 다른 탱크부대와 함께 고서, 금재를 지나 29일, 18.30시 이리 남쪽의 파괴된 어느 다리에 도착하고 밤을 위하여 정지했다. 24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지원거리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면서 뒤따라갔다.
27연대는 1대대를 선두로 9월 29일, 08.00시 진격명령이 떨어졌다. 함양에서 남원까지 진격하는 동안 적군은 만나지 않았다. 연대는 주 보급로의 안전 원칙을 지키면서 우회하는 고립된 적군 척결은 물론 이웃 부대와의 접촉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단장은 사단 CP를 떠나 공격의 최종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돌격 선두부대를 돌아보면서 격려했다. 사단장은 9월 29일, 08.00시 진주 북쪽의 CP에서 남원으로 출발하는 부대와 함께 나아갔다. 이튿날 새벽 칸보이 트럭이 지뢰에 폭발하고 사병 1명이 다쳤다. 선두 차량이 뒤돌아와 사유를 알아보는데 또다시 지뢰가 폭발하여 사단 통신장교 1명, 사병 2명, 한국 통역관 1명이 사망했다. 칸보이 차량은 불에 타고 이동이 지연됐다. 방어소대가 발 빠르게 전개하여 몇 명을 사살하고 몇 명을 포로 했으며, 사단장은 그때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11군단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9월 30일, 낮에 한 운전병을 남원 동남쪽의 순천으로 보내고 여수에 머물고 있는 한국 해병대와 만나 여수의 항구 시설과 여수-순천간의 철도 사정을 알아본 후 보고하도록 하라. 27연대 1대대가 현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것이다. 이 메시지는 부대의 전술공군 통제소의 연락기로부터 무전으로 전달되었다.
이리시의 한 다리가 부서지고 모든 차륜이 한 곳에 모였다. 이리에 주둔하고 있는 24연대 3대대가 야간에 보급하여 수리했다. 3대대는 9월 29일, 17.20시 탱크와 포병 지휘 하에 임파 지역의 고지대의 1개 대대 규모의 적군을 공격했다. 적은 다치고 죽고 장비들을 버려둔 채 북쪽으로 사라졌다. 30일, 09.00시 24연대 1대대는 군산으로 진격하고, 13.00시 군산시 접수를 명령받았다.
돌빈임무대는 이리시를 접수하고 금강으로 이동한 후 강변 전선을 안정시켰다. 이로서 돌빈 특수임무대의 의무는 끝이 나고 부대들은 원대 복귀 준비를 서둘렀다. 주변을 정찰하고, 재보급 받고, 차륜들을 손보기 시작했다.
27연대 I와 R소대는 제2보병사단의 일부 병력과 안의에서 접속한 후 우회하는 고립된 적군을 찾아내기 위하여 정찰했으며 함양과 언송 지역에 머무르고 있는 병력과 함께 주 보급로의 안전을 도모했다.
9월 30일, 미25사단은 한국의 서쪽 연안 군산에 이르렀다. 황해가 가로놓인 전략적인 항구이다. 사단은 한국의 남단 마산에서 200마일 320km를 달려 마지막 목적지 군산에 이르렀다. 이름 하여 ‘인민군’은 끝내 패하고 요절났다.
6·25전쟁의 서부 전선은 마산에서 시작하여 진주➝남원➝공주➝이리에 이어 군산을 탈환함으로써 사단의 임무는 끝이 났다.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젠 북진만이 남아있다. 지금은 성마르고 눈부시지 않은 고립된 적을 격파하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모든 부대는 주둔지와 책임 존에서 어정거리는 적과 큰소리치는 지역 현관들과 계속 싸워야하며, 시민 선별 작업을 도우고, 적군의 위치를 알려주고, 안정을 도모하면서 애쓰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
전상 진료소 내담 병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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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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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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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소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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