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연대 3대대는 9월 11일, 11.00시 5연대 1대대가 자리했던 진지에 자리 잡았다. 적은 교대 과정 중에 자동무기와 경화기로 진지를 공격해왔다. 27연대 병사들은 주 저항선을 따라 포상작업과 정찰업무를 계속했으며, 2대대는 박격포와 포탄을 공격 받았다.
적은 11일, 05.00시 경화기를 내두르면서 24연대 E중대를 공격했지만 곧장 물리쳤다. 3대대는 충분하게 방어하기 위하여 주 저항선 진지에서 재편성을 서둘렀다. 한편 정찰조는 적군의 위치를 파악했으나 어두워지고, 연대 CP와 후위에 적 포격이 시작되었다. E중대는 적의 소화기 공격을 받았으나 공격해오지 않았다.
9월 11일, 03.46시 35연대의 고요는 B중대와의 쌍방 간의 총격의 초록색 너울이 교차되는 가운데 끝이 났다. G중대는 중대 병력의 적군으로부터 공격받았으며 30분간 지속되었다. 적들은 끝내 진지로 침투하지 못했다. 역공을 시작하고 자주포를 향하여 역 포격을 시작했다. 산발적 포격이 한낮에 2대대 존에 떨어지고 전투정찰대가 후위의 고립된 적을 청소했다. 2대대는 늦은 오후에 자주포와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적군은 근래 공격이 크게 향상되었다. 적군의 6사단과 7사단, 83기계화연 대, 105화기사단의 일부 병력들은 최근에 병력과 장비가 크게 증강되었다. 총 병력이 29,500명이며 편제상 미군보다 우위에 있다. 이 병력 외에 후방은 104안전연대 1대대와 24대대가 별도로 운용되고 있으며 최전방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적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40%의 사상자, 도망병 등 처단된 병력 10%이며, 83기계화연대는 지난 8월 전투 중 미 해병대, 한국 해병, 5연대에 의해 피폭되고 일찍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적군 6사단은 최근에 새롭게 강군으로 교체되었다. 사단포병은 자주포, 70mm포, 기타 경포로 중무장하고, 박격포를 포병대는 물론 소부대까지 기본으로 무장했다. 6사단은 부산 돌출부의 적군 중 근간back bone이다. 탄약 운반은 지역민들이 담당하고 있으며 만족하고 있다. 무장은 위장복 없이 작은 마을 전쟁 한 번 치른 듯 남루하지만 병정들은 고집스럽고 전투에 숙달되어 있으며 포병과 공중지원이 없고 영양식이 빈약하지만 자력이 풍부하다. 공격할 때 신참들이 눈에 나면 윤리 도덕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질 수 있다. 오리지널 정예 병력은 6,000명 선이며 점령지역에서 또다시 쉽게 모병할 수 있다.
공산군 7사단은 1950년, 이른 7월에 창설되고 마산 전선으로 이동했다. 초기는 무장이 잘 되었지만 9월 1일 미군 35연대를 공격하기 전까지였으며, 그 후 훈련받지 못한 신참들로 교체되었다. 전투 베테랑은 중국 공산당이 보낸 중국군이 있으나 그것마저도 베테랑이 아니며 수마저 턱없이 적다. 약 30%가 경험 있는 군인들이며 나머지는 의심스러운 병정들이다. 포병은 유치하다. 연대포대가 포격을 담당한다. 포병 지원은 연대 선에서 이루어진다. 3개 연대 병력이며, 하지만 높은 전투 의지로 정지하거나 후퇴를 거부하며 영광스럽게 싸운다. 쓰러질 때까지 싸우며 대신 높은 사상자를 낸다. 약 7,000명 수준의 사단이다.
한 넓은 다리 밑에 자리 잡은 27연대 CP
1950년 8월 초, 마산 점령을 노린 104안전요원 연대는 별나다.
1950년 7월 24일, 서울을 점령한지 한 달 만에 서울에서 창군되었으며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과 노동자들이다. 장교를 제외한 준사관들도 현지에서 급조되었다. 간단한 신체검사 이후 연대는 훈련과 중무장 없이 소총만으로 서울을 출발했다. 그것마저도 남하하면서 노획한 소총들이며 점차 기관총, 3.36인치 로켓포로 무장하게 되었으나 노획한 무기들이었다. 이들은 점령지역 치안요원들이며 부상자나 포로는 거의 없으며, 그러나 병력 정수상의 전투요원들이다. 약 2,000명과 연대본부 요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말한다. 한국 학생들은 1945년 일제 해방 이후부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깊게 침투되어 있었다. 공산주의 군인들이 서울을 점령하자 때를 만난 듯 자원입대했으며 즉시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군인이 되었다. 그들은 군인이 되면 친교를 거절한다. 동무들과 싸우지 않으며 이것들은 공산주의 이론이다. 학생들은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떠나지 않고 스스로 ‘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인민위원회는 학생들은 학교에 계속 다니고 졸업할 때까지 공부시켜 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교는 집단 회합에 동원한 후 정치적 강의를 듣게 하고 집단적으로 군인이 되기를 재촉했다. 그런 후 젊은이들은 감시 하에 군 훈련소로 행진했다.
사단 전선은 9월 12일, 주 저항선의 방어진지를 견고하게 손질하고, 후방 적군의 활동을 소탕하는 일을 이어갔다. 27연대 3대대 정찰대는 주 저항선 진지 150야드 전방으로부터 중화기 공격을 받았다. 포격으로 반격하여 요절냈다. 어두워지자 적군 정찰대는 K중대 진지를 공격했으나 재빨리 격퇴했다.
12일, 새벽이 오기 전에 24연대가 있는 함안면 서쪽 도로에 차단 포격이 날아오고 정찰대가 전위를 탐침했다. 연대 진지는 아무 일 없었다. 또다시 산발적 소화기와 박격포탄이 낮 동안 3대대 진지에 떨어졌다.
35연대 C중대는 포격이 멈춘 후 소대 규모의 적이 공격했다. 적은 돌아가는 듯하더니 더 많은 병력으로 4차례 공격해왔으며 중대는 150야드 후퇴했다. 즉각 역공하여 진지를 되찾았다. 의약품이 공수되고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적은 또다시 후위에 요란사격하면서 기습했다. 159야전포병대대 3곳의 포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소화기와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65공병대대 B중대는 25수색중대와 후방의 적을 쓸어버리도록 했다. 중대들은 함안군 칠원면 남서쪽 능선의 적을 공격했다. 진지가 견고하고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느리게 전진했다. 같은 시간에 35연대 I중대는 보강되고, 2대대 대대장의 지휘 하에 2대대 존 후위에 침투한 적을 공격하고 분쇄를 이어갔다.
사단은 9월 13일, 8군사령부로부터 보다 효과적인 임무 수행을 위한 작전계획서가 내려왔다. 사단장은 사단 CP에서 3개 연대장과 곧 시작될 공격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책임 존과 진격 루트 등이며 이렇게 연대는 할당받았다.
제한목표 공격은 산속의 적의 진지이며 27연대 K중대가 9월 13일, 진지 가까이 있는 고지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공격했다. 2개조로 나뉘어 잘 구축된 진지를 공격했으며 16.00시 빠르게 끝이 났다. 적군의 소화기와 박격포가 낮 동안 연대 존에 계속 날아왔다. 정찰조가 전방을 공격적으로 엄호하면서 참호를 보강했다. 24연대는 정찰과 방어를 더욱 견고히 했으며, 저녁이 되자 적의 간헐적 포격이 K중대 근방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9월 13일, 적군은 35연대 섹트에 공격을 집중했다. 06.00시 G중대 진지에 포격과 박격포가 절정에 달하고 또다시 능선을 넘어 침투해 왔다. 포격으로 정지되었으나 부상병이 속출했다. 무장 장갑차가 진지 한복판에서 보급품을 내려주고 지뢰를 제거하면서 부상병을 후송했다. 1대대 존에 몇 발의 평사포격이 작열하고 F중대가 자정이 되기 전에 가볍게 공격 받았다.
9월 14일은 전선 후방의 고립된 적을 소탕하는 날이다. 적은 35연대 2대대 후위의 가까운 지역(145-1571.5)의 능선에 방어진지를 단단하게 구축해 놓고 있었다. 35연대 2대대 후방 1145-1571.5 지역의 능선이었으며, 이 지역은 특수임무대가 고립된 적을 섬멸하고자 했던 곳이다. 35연대 I중대는 좌측선 방향으로 빠르게 200야드 나아가고, 65공병전투대대 B중대와 25수색중대는 진지의 북쪽과 서북쪽으로 천천히 진격해 갔다. 지형이 매우 험난하며 구축한 진지가 강력했다. 하루 종일 공방전이 이어지고, 진지의 적들은 많은 이점하에 벽을 설치하고 자동화기로 저항했으나 항공기가 지원했으며, 늦은 오후 목표지점을 포위하고 적 진지의 후위로부터 공격하여 많은 적이 죽고 무기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35연대 F중대는 존 중앙선의 남강변 진지의 G중대와 교대한 후 우측 측선의 중대 병력의 적의 반복적 공격을 받고 쫓아 버렸다. 적의 요란사격은 2대대 전방으로 새벽까지 이어졌다. 6개조의 정찰대가 주 방위선 전위로 나아가 2명을 포로하고 많은 적군을 사살했다. 한곳의 탄약집적소를 파괴하고 약간의 무기를 압류했다.
24연대 2대대는 이른 아침 적군의 요란포격을 받고, F중대는 중박격포격을 받았다. L중대는 9일, 02.00시 수를 알 수 없는 적군이 공격해왔으며 왼쪽 소대가 후퇴했다. 잃은 진지를 되찾기 위한 역공은 적의 자동화기 공격으로 또다시 물러나고, K중대가 역공하여 진지를 되찾았다. 한 소대는 적들이 잠복해있는 지역의 목표지점에 이르고, 남은 중대원들은 15일 이른 새벽, 위의 소대와 링크했다.
한 적군 무리가 14일, 06.00시 I중대를 공격했다. 후위에 있던 5명의 포로가 도망갔다. 전투정찰대가 연대의 남은 지역을 강력하게 정찰했다.
박격포가 27연대 3대대 I중대와 K중대 진지에 날아들고, 소대 병력으로 추산되는 적군은 14일, 03.30시 L중대를 공격해왔다. 적들은 24연대 존의 우측방 진영을 돌파한 후 계속 공격했으며, 아침 내내 3대대를 향한 차단포격과 자주포 포격했으며 또다시 중대 규모의 적군이 전방과 우측방에서 공격해왔다. 진지가 뚫리고 포격과 시한사격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L중대는 4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I중대의 한 소대와 한국군이 우측면을 지원했으며 육박전으로 가까스로 물리쳤다. 오후 늦게 G중대를 공격한 적은 항공기 근접공격으로 물러갔다.
35연대는 이토록 방어진지를 구축한 적이 없었다. 중요한 언덕의 정상은 전역을 보루로 정하고 자동화기로 완전하게 구축했다. 참호 안의 2명은 전방경사와 후방을 견고하고 단단하게 보완하고 위장하여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파괴가 불가능하게 했다. 적들은 총검과 수류탄으로 진지를 공격해왔으며 특수임무대는 반격했다. 107명을 사살하고 20명이 포로되었으며 많은 장비들을 노획했다. 적군들은 와해되고, 공병과 수색중대는 24연대와 접속한 후 3대대를 돌파하려는 공격을 막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8군 예하의 진격하는 모든 단위 부대장에게 텔레타이프가 급송되었다. 타격 H-hour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은 9월 16일, 06.30시이며, 8군사령부의 모든 군은 전방 배치하라는 전문이었다. 최대의 항공지원은 06.00 시~06.25 시까지이다. 그 이후에 모든 섹트는 차질 없이 공격한다.
24연대 3대대는 적의 먼 곳에서의 요란포격은 15일, 04.00시까지 이어졌다. 이 포격은 14일부터 3대대의 좌측면으로 시작된 포격이며 약 500명의 반자이 병정들이 박격포 지원 하에 15일, 05.00시 파상으로 3대대를 공격했다. C중대 진지는 넘어가고 K중대가 급히 지원했으나 I와 L 중대는 후퇴했다. 적군은 대대의 모든 전방을 넘어 능선을 차지했다. 3대대는 주 방위선에서 후퇴했다. 근접항공기 공격이 빼앗긴 진지를 되찾기 위하여 다가가는 미군들을 지원했다. I중대는 중대 원래의 CP에 이르고 K중대는 목표지점에 이르나 경포공격으로 또다시 크게 와해되었다. 중대장과 40명이 남았다. 중대는 재정비하여 균형을 유지하고 언덕으로 되돌아왔다. 어두워지자 1대대와 2대대는 적군의 정찰과 경화기 사격을 받았다.
27연대 3대대는 서북쪽의 적군 진지로부터 경화기와 평사포격을 받았으며, 적의 위험에 대비하여 세운 북쪽의 OP는 측면으로 공격을 받고 침투했다. 120mm 박격포 8발이 14일 24.00시~15일 01.00시 사이에 G중대 앞쪽에 떨어진 후 다시 02.00시 짧게 포격했다. 연대 정찰이 하루 종일 이어지고 주 저항선 진지 전방에서 적군과 마주쳤다. I와 R소대는 후위에서 15명의 적과 교전했다.
새벽에 F중대는 공격받기 전에 간헐적 소화기와 포격이 남강을 넘어 35연대의 전위 진지로 날아왔다. 이어 100명의 적군이 35연대 돌출부 안의 F중대를 공격했으며 육박전이 벌어졌다. 적군은 격퇴되고 다른 공격은 없었으며 연대의 모든 부대는 정찰을 하고 낮 동안은 조용했다.
저녁이 되자 적은 공격을 시작했다. 계획된 공격이었다. 날씨와 시야가 흐려 공격이 느렸다. 전략공군도 지상군 작전을 도울 수가 없었다. 적군은 24연대 우측면의 주 방위선 능선을 아직도 점하고 있으며 연대의 우측면과 존의 방어에 한계를 느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