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호에서는 아라가야 멸망 이후 통일신라시대 사이의 유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서 마무리 하지 못한 성산산성과 목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성산산성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아라가야 산성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그러나 발굴 결과, 예상과 달리 돌로 정교하게 쌓은 신라의 산성으로 판명되었다. 성의 외벽 하단부(기단부)에 보강시설을 하는 축조 기법과 지금의 성벽과 같이 만들어진 부엽층에서 발굴된 목간은 이 산성의 축조연대가 통일신라시대임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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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이 만들어진 부엽층(목간 출토층) |
목간이 다량으로 발굴된 부엽층은 지형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당시 우수한 토목기법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부엽공법으로 시공된 구간은 성산산성 내부에서 가장 낮은 남문지 일대로 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우려되는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불리함 때문에 폭우 등으로 인해 많은 양의 물이 일시에 유입될 때 스펀지 같이 물을 머금어 서서히 배수되게 함으로써 성벽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한 특별한 토목공법이다. 이 공법에 사용된 소재가 나무인데, 사용 후 폐기된 목간이 부엽공법의 자재로 활용된 것이다.
성산산성 부엽층에서 발굴된 목간은 3백여 점으로 우리나라 고대 목간중 절반 이상이 여기에서 발굴되어 고대 문자 및 신라의 관등, 조세체계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두식 표현이 확인되는 목간도 있어 국어사적 의미도 크다.
출토 목간은 물품의 꼬리표로 활용된 하찰목간이 대부분이며 현재 연구 성과에 따르면 낙동강 상류의 신라지역에서 보낸 것이 대부분인데 이를 통해 신라의 조세체계를 엿볼 수 있다. 한편 목간에 적힌 ‘구리벌’ 등 지명에 있어서는 함안지역이었다는 이견도 존재한다.
그리고 소수이지만 공문서에 해당하는 목간이 확인되기도 하였는데 몇 점의 목간에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공무원의 시말서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물품 운반 중 도둑맞은 이야기도 있고, 촌주가 6백의 벽돌을 위하여 대성(성산산성)으로 성인남자 60명을 데리고 가려는 날에 이곳에 와서 머물던 김유화가 갑자기 죽어 장례 때문에 역(役)을 이행하러 가지 못함을 보고한 것도 있다. 이 목간에서는 하나의 촌에서 성산산성에서 60명의 성인 남성이 6백의 벽돌을 할당받았음을 알 수 있다.(221번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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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번 목간 |
또한 최근에 진내멸(眞乃滅) 지방의 촌주(村主)가 중앙(경주) 출신 관리에게 올린 목간에서는 잘못된 법 집행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는 내용의 목간이 보존처리 후 공개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법률인 율령(律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60일의 법집행을 하여야 하나, 30일을 집행하여 급벌척과 대사의 지위에 있는 책임자에게 두려워하며 보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간에서 ‘□법 30대(□法卅代)’, ‘60일대( 日代)’ 등의 표현은 30일, 60일이라는 기간을 명시해 놓은 법률 용어로, 신라는 율령으로 지방을 지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외위가 아니라, 신라 왕경인 대상 관등체계인 경위(京位)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목간에서 경위(京位) 중 12등급인 ‘대사(大舍)’라는 관등명이 발견된 것을 통해, 함안 성산산성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급벌척(及伐尺)’이라는 외위 관등명이 새롭게 확인되기도 하였다.
한편, 다수의 학자들이 성산산성과 목간의 연대에 대하여 6세기 중~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그에 반하는 연구논문이 발표되어 주목된다. 성벽과 부엽층이 연속 공정으로 이루어져 있어 동시에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부엽층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7세기 전반의 늦은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연대를 수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이 연구를 따라 성산산성의 축조시기가 반백년 가량 늦어졌다고 하여 함안 역사가 퇴보하거나 열등해진 것은 아니다. 공주의 공산성의 사례에서 보듯 우연한 기회에 지금 성벽 아래에서 아라가야의 흔적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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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