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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원 |
나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함안면 미산리에서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세살 무렵 가족들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는데 부모님은 그곳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열두 살 무렵,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의 공습이 이어지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죽어도 고향에서 죽어야겠다’는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다시 고향 함안으로 돌아오게 됐다.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고 부친은 혼자서 나와 형제들을 키워내셨다. 제대 후에 결혼하고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고 있으며 이 집에서 계속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몸이 많이 쇠약해 거동하기힘들어졌다.
6·25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나는 창원 북면의 고모님 댁에서 지내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어수선하던 그 당시에는 전쟁터에 나가면 다들 죽는다는 말때문에 남자들은 도망을 가거나 숨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18세 어린 혈기로 가득했던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내목숨, 내 나라는 내가 지키겠다. 비겁하게 도망가거나 숨지 않고 당당하게 내 발로 입대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홀로 남은 부친에게 알리지 않고 11월에 입대를 했다. 이렇게 자원입대한 것이 햇수로 7년, 복무 개월로는 5년하고도 몇 개월이 더 되는 긴 시간이 되어 버렸다.
목총에 총의 명칭을 붙여두고 총기교육을 했고 짧은 기간 동안 제식훈련 등이 이뤄졌다.
휴전선 인근 최전방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3사단 18연대의 다른 이름은 백골부대였다.(1950년 7~9월까지 낙동강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유명한 부대였다.) 주로 전방을 지키면서 방어전선을 구축하고 지원요청이 있을 때 지원을 나가거나 한달에 한두 번 정도 무리에서 이탈된 적군을 생포해 정보를 얻는 것이 주 임무였다.
1952년에는 우리 부대가 포위당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부대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 이미 도로와 교랑은 파괴되어 트럭, 탱크도 무용지물이 된 상황에서 우리는 싸워가며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15일 동안 헬리포위(포위망 이름)를 뚫고 나오면서 210명이었던 중대원은 10명만 살아나왔다. 우리가 떠난뒤 북한군이 남겨진 물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무전을 해서 아군 비행기가 부대에 남아있던 탱크와 트럭 등의 물자를 폭격했다. 당시 구급차에 부상당한 병사들이 타고 있었는데 구급차와 함께 폭격을 당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은 어떻게든 자기가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1952년 10월에는 까치봉 탈환에 성공했다. 일주일 간의 교전끝에 탈환한 까치봉은 해발 742m로 지금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이남 최북단관측소가 있는 곳이다. 지형이 험악하고 겨울에는 폭설과 강풍으로, 여름에는 짙은 안개로 시달리는 등 기상조건이 나쁜 곳이지만 전략적 요충지라 아군과 적군의 교전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까치봉을 탈환하기 위해 정예부대인 백골부대에게 탈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단 정찰기가 까치봉 일대를 한바퀴 둘러보고 나면 연막탄이 터지고 소위 ‘쌕쌕이’라고 불리는 제트전투기가 적진을 융단 폭격했다. 그리고 육군 부대였던 우리가 마지막으로 투입돼 지상전을 벌였다. 까치봉 탈환으로 우리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해골마크를 연상시키는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우리 부대는 북한군이 두려워하는 제법 강한 부대였던 모양이다.
강원도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제대로 된 군화가 없어 농구화를 신고 동상과 싸워야 했다. 계속 움직여서 동상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했다. 또 눈이 오면 안쪽이 새하얀 방한복을 뒤집어서 입었다. 밥이 얼어서 베어 먹는 일도 많았다. 배식사정도 열악했다. 쌀알이 길쭉하게 생겨 끈기가 없고 밥을 해도 푸석푸석 찰기가 없어 훅 불면 날아가던 알랑미.(정식명칭은 안남미(安南米). 베트남의 지명 안남을 딴 것으로 베트남이 우리에게 원조해 준 쌀이다.) 입김에도 날아가듯이 금세소화가 돼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최근에는 젊은 여성들이 다이어트를 위해 알랑미로 밥을 해먹는다는 소리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런 알랑미 밥마저 중간에 보급이 새거나 안 되면 몇 끼를 굶는 것은 예사였다. 국은 콩나물국이 주로 나왔다. 건더기인 콩나물이 너무 없어 국물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거울 같던 소금국이었다. 우스개 소리로 ‘너 콩나물 대가리 몇 개 먹었어?’라고 물었을 때, 콩나물 대가리가 많으면 고참, 적으면 신참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가끔 멸치 2~3마리가 특식으로 나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제대한 이후 나는 농사를 지으며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왔다. 군대에서 함께 한 전우들은 연락이 모두 끊겼다. 강원도에 있었던 전우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곁에 있던 전우가 죽어서 무덤을 만들고 총을 거꾸로 꽂아 철모를 걸어두고 온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지금이라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현재는 농촌에서 곶감 등 소일거리를 해가며 무궁수훈자 수당 15만 원과 재향군인회에서 나오는 15만 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목숨을 걸고 참전한 만큼 지원이 늘었으면 좋겠다. 또 같은 참전용사라도 국가유공자와 상이군경은 혜택의 차이가 커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때가 많다.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참전한 만큼 어느 정도 동등한 지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지금도 잠들기 전 눈을 감으면 전쟁의 기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전쟁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다시 전쟁이 일어나 참전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살기 위해,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내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참전하겠다고 말할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남자로서 당당하게 나라를 지키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겪은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