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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 |
21살에 징집 통지를 받고 군북역에 모였다. 15살이란 어린 나이에 결혼했던 나는 아이가 있어 1년 늦게 입대하게 됐다. 아내를 혼자 두고 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눈앞에 아내와 아이가 아른거렸다.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었다.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갔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하사관 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지금 서울 중앙대 근처에 있던 미군부대 자동차 수송중대에 들어가게 됐다. 나는 전방으로 보급품과 포탄을 운반했다.
최전방 근무를 하지 않았던 나는 다른 6·25전쟁 참전용사보다 편하게 지낸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맡은 바에 최선을 다했다. 미군부대에서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섞고 몸짓, 발짓까지 동원하며 공부한게 생각난다. 미군부대는 한국부대와 다르게 대우가 좋았다. 미군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외롭기도 했지만 다른 한국 전우들이 많은 위로가 됐다. 최전방 근무를 해보지 않은 나는 전투를 통 몰랐다. 진짜 고생을 많이 사람들은 최전방 참전자들이다. 나라를 지켜준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맙다. 미군부대로 흐르는 하천이 하나 있었는데 새빨간 핏물이 섞여 내려올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미군도 참 많이 죽었다.
지금 사람들은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속상하고 답답하다. 요즘 반미 성향을 띤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면 벌써 한국은 절단이 났을 것이다. 천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미군부대에서 근무를 안 했었다면 모를 일이지만 미군들은 참 양반이었다. 서로 격려해주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사다웠다. 근무 후 휴식시간에 책이나 라디오가 없으니 동기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이가 들어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전우들이 꼭 한 번 보고 싶다.
전쟁 도중 최전방에 있던 한 친구가 부상을 당하고 도저히 전쟁터에 못 있어서 미군부대로 내려왔었다. 서로 도와주며 근무를 하다 같이 제대했다. 연락이 한 번도 닿지 않았는데 10년 전쯤 전화가 왔다. 나를 찾아준 친구가 고마웠다. 마산역 앞에서 만나 술을 한 잔 하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헤어지고 난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친구는 대구 사람인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궁금하다.
5년이 넘는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아내는 다행히도 몸 건강히 있었다. 지금은 1남 6녀의 자식들을 두고 있다. 60년이 지난 이야기를 꺼내려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우 이름도 다 잊어버려 찾을 수가 없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이 나온다면 꼭 많은 젊은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내 말솜씨가 좋진 않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 바쳐 지킨 대한민국인지 알아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