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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참전용사 회고록-27

이영희(1932년생) 지내시는곳 : 가야읍 가야6길

기사입력 2017-03-1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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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령군 유곡면에서 태어나 10살 때 부모님을 따라 함안군 법수면 악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초등학교도 수업료를 내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라 초등학교는 다녔으나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부산에 살고 계시는 5촌 아저씨께 부탁해서 그 집에서 중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때 법수면에 초등학교가 1개 있었는데 우리 반 60명 중 12명이 여자이고 모두 남자였다. 일제시대라 우리나라 글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글로 공부를 했고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복사를 해주면 그것을 쓰면서 공부를 하던 시기였다. 중학교에 가서야 기역 니은을 배우고 영어를 배웠다.

1950년 나는 19살이었고 부산 항도중학교 2학년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 6월에 방학을 해서 집에 있던 중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부모님과 함께 법수에서 대산 쪽으로 해서 식량과 간단한 이부자리를 짊어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불안하고숨어서 다니느라 제대로 피난을 갈 수가 없었다.

그때는 방위군이 있어 순찰을 했고 남자는 보이기만 하면 전장에 끌고갔다. 나중에 보니까 살아남은 사람은 잡히지 않기 위해서 집에 굴을 파고 있거나 다락 위에서 숨어 지낸 사람들이었다. 나는 김해 정도 가서 자원을 하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다니다가 왔다고 했더니 학도병으로 편입을 해 주었다. 1950년 9월 3일 입대해 구포 교육대에서 1주일 간 교육을 받고 초등학교, 중학교 다닌 사람들을 구분해서 부대 배치를 했다.

그때는 무학자가 많았는데 영어를 배웠다고 미국군 통역 겸병사로 미군부대에 배치(미제24사단 11야포대대 1중대 1소대)를 받았다. 당시 미국 군인은 일본전에 참여했다가 다시 우리나라에 파견이 됐는데 백인과 흑인 중 흑인들은 유달리 한국군인을 무시하고 괴롭혔다. 흑인들은 “한국인, 너희 때문에 우리가 전쟁터에 왔다.”고 한국 군인에게 인격적으로 모욕을 주고 때리고 총으로 쏴 죽인다고 하면서 엄포를 놓는 등 틈만 나면 괴롭혀 백인이 중간에서 싸움을 말리고 중재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미8군부대에서 인민군과 일반인들을 붙잡아 오면 우리가 통역을 해주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로 말하는 것도 대충 알아듣게 되었는데 인민군이나 일반인 중 사상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은 골라내어 그 자리에서 사살을 시키기도 했다.

전쟁이 점점 낙동강까지 내려오면서 나는 중학교를 다니다 왔다는 이유로(12분대장) 전장에 참여하게 됐다. 낙동강에서 전투를 시작해 북진하게 됐고 신의주, 구성,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됐다. 그때가 11월경이었는데 중공군 100만 대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에 후퇴했다. 평양에서 소련군의 전투기 출두로 폭탄이 투하되는 위급사항이 되는 등 아군과 적군의 전투가 치열했다. 수 일 후 1·4후퇴로 다시 현재의 38선 강원도 김화, 화천발전소, 부진산으로 이동했다가 휴전으로 전쟁이 종료됐다.

나는 군복무를 4년 동안 했는데 당시 제대라는 것이 없었다.

1년은 전쟁에 참여했고 휴전이 되면서 서울계엄사령부에서 3년 동안 근무하고 만기제대를 했다.

전쟁 중 우리 군인들도 질서가 잡히지 않았고 대구 왜관과 낙동강 유역, 전쟁이 심할 때에는 함안에도 사상자가 널려 있었다. 중리고개에서 함안 쪽은 곳곳에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널려있어 우리는 시체를 넘어 다니며 전투를 했다. 전쟁 중에 죽을 뻔한 고비도 있었다.

서울에서 북한 쪽으로 100리 정도 올라가다가 눈이 쌓여 있고 강에도 얼음이 얼어 있어서 도로인지 강인지 분간이 안 되는 상황에서 차량이 강물에 전복되어 버렸다. 우리 일행이 9명이었는데 모두 배꼽까지 얼음물에 빠져 얼어 죽을 판이었다. 밤이었고 무전도 안 되어 차위에 올라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덜덜떨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4시쯤 되니까 우리 앞에 움직이던 동료들이 무전도 안되고 따라오지 않으니까 분명 사고가 났다며 우리를 찾으러 왔다. 모두 몸이 꽁꽁 얼어 있었고 동사되기 직전이었는데 미군부대에는 응급차가 항상 따라 다녔기에 한 달 동안 치료를 받고다시 전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때 그렇게 추웠는데도 얼어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것이 지금도 신기할 정도이다. 당시 포를 움직이려면 9명이 1개조가 되었는데 우리 일행 9명은 모두 구조됐다.

당시 한국군인은 무기도 열악했다. 포와 박격포를 가지고 전쟁을 했는데 평양에 올라가니까 소련군 전투기가 나타나서 공중에서 기관총을 쏘곤 했다. 당시 포(크기가 70~80cm)는 한개가 폭발하면 주변 30m까지 폭발하곤 했다. 포가 폭발할 때 엎드리면 살았고 서 있는 사람은 다 죽었다. 38선 부근에서 전투를 할 때 인민군은 산 위에 있었고 일선 군인은 산 중간에, 우리 일행은 밭에 있었는데 포탄이 수시로 날아들었다. 아군이 1,000명 정도 있었는데 거의 다 죽었고 조종사와 나만 살아남았다.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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