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순구 |
1950년 19살의 나는 오촌 집에 가서 일을 하다가 오후에는 함안 읍내에 있는 야간 중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나는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를 듣고 10월에 부산 서대신동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집에는 불이 났었고 학교 다닐 형편도 안 됐기에 곧장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일주일 간의 짧은 훈련을 받고 12월에 강원도 중부전선 보병 9사단 30연대에 배치됐다. 군대는 젊은 청년들이 수두룩했다. 한참 많이 먹을 시기인데 밥이 부족했다. 배가 안 차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이도 있었다.
비참했다. 총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겨우 총을 결합하곤 했다.
겨울엔 방한복과 속옷을 한 벌씩 나눠줬다. 그땐 빨래는 생각도 못했다. 옷 한 벌 받으면 그게 끝이었다. 구멍이 나서 헤져도 뒤집어 입고 다시 뒤집어 입기를 반복했다. 이가 너무 많아서 잡지도 못하고 ‘툭툭’ 털어내면 ‘투두둑’ 떨어졌다. 깨 털 듯 이를 털었다. TT가루라고 미군부대에서 이 잡는 약을 줬는데, 바르면 빈대가 발동을 해서 미친 듯 가려웠다. 피부가 벌겋게 됐다.
밤이 되면 호를 파서 2~3명이 한 담요를 덮고 자는데 잠은 자는 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졸다가 전투가 일어나 바로 뛰어나갔다. 무서운 것도 몰랐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뛰다보면 내가 밟고 있는 게 땅인지 시체인지도 몰랐다. 내가 죽을판인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나이도 거기서 거기였다. 젊은 청년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아이고~ 엄마” 지나가면 업어 달라. 데려가 달라. 곳곳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아직도 생생히 들린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데리고 나오지 못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분명 데리고 오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부상을 입어
이동하지 못해 죽은 군인도 많았다. “밥~” 앓으며 밥을 찾던 사람도 많았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살아오면서 항상 이 이야기를할 때면 마음이 찡하다.
나는 암호병이었다. CID에선 사상이 확고한 사람에게만 암호병을 시켰다. 암호가 누출되면 부대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기에 나는 책임감을 느꼈다. 암호서류를 들고 다니며 매일 바뀌는 암호를 상관에게 전달했다. 어느 날은 암호가 ‘잡자 돼지’였다. 아군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인민군에게 암호를 누설했다. ‘잡자’ 아군이 묻자, ‘돼지’ 인민군이 말했다. 그 날 부대 전체가 몰살당할 뻔했다. 끔찍했다.
강원도 인제에서 전투 중 군단이 포위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늘이 노랬다. 탄창 케이스를 채우고 실탄 두 박스를 챙겼다. 항고와 생쌀, 건빵도 챙겼다. 챙기지 못한 짐들은 인민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불에 태웠다. 아까웠다. 전차와 장갑차 사이사이에 12줄로 빡빡하게 긴 대열을 맞춰 걸어가는데 서글펐다. 내가 나중에 두 다리로 걸어서 집까지 갈 수 있을까.
해가 지고 으슥할 때, 어디서 나왔는지 갑자기 포탄이 떨어졌다. 아군이 사방팔방으로 도망가다 보니 곳곳으로 흩어졌다. 나는 전우와 작은 초가집에 몸을 숨겼는데 여기저기 총알이 날아왔다. 방문을 뚫고 벽에 퍽퍽 꽂히는데 정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전우마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소리를 질렀다. 정신이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뛰쳐나가 산속으로 달렸다. 귓가에 ‘픽픽’총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달리다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없을 땐 맞아도 모른다. 피가 나야 아픈지 안다.’ 는 선임의 말이 생각나서 몸을 살펴봤다. 어찌된 일인지 한 방도 맞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도 전우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걸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그렇게 해서 가다 보니 아군이 하나둘 모여 몇 백이 됐다. 나름 작전을 짜서 하룻밤을 걸었는데 다음 날 아침 똑같은 그 자리였다. 헛웃음이 났다. 잠도 제대로 자지도 못했지 밥도 제대로 못 먹어 죽을 판인데 뭐가 대수랴. 대소변도 딱히 정해진 곳없이 대충 해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 부대는 아군을 찾기 위해 계속 걸었다. 걷다가 10분 휴식이 주어지면 혹시나 낙오될까 앞 사람 허리를 붙잡고 잤다. 소나무를 부여잡고 서서 졸다 낙오되는 사람도 있었다. 며칠을 걸어 우리 부대를 찾을 수 있었다. 통신 대장이 나를 무척 반겨주었다. 장교도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비쩍 말라서 부대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군대에서 약 4년을 보내고 7월 27일 제대를 했다. 교통 헌병이 신분 확인을 하고 트럭에 태워주는데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말로는 표현 못한다. 제대 후 결혼을 했다.
인민군 때문에 하고 싶던 공부도 못했다. 가족, 친구도 잃었다. 내 군번은 022XXXX다. 군번만 있으면 군대에서 있었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고 들었다. 확인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받쳐 싸웠는지 알 수 있다. 힘들게 지킨 나라이다.
TV 뉴스에 나오는 임병장, 윤일병 사건. 서로 도와주고 챙겨주던 옛 군대와는 다른 모습이다. 오늘 저녁에 죽을지 내일 저녁에 죽을지 모르지만 전우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애국심과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필요하다.
마을에서 6·25전쟁에 참전한 사람이 나 말고도 많았다. 그런데 다 죽고 나 혼자 남았다. 더 훌륭한 이도 많았고, 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는데 아쉽다. 부디 국민들이 참전군인을 잊지 않길 빈다. 김해, 부산 빼고 전부 인민군 땅인 때도 있었다. 되찾은 나라를 소중히 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