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고향)이란 말은 사전적 의미로,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란 의미 외에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를테면, 고향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삶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라는 원초적인 의미를 가진다.
기자는 매년 재경함안군향우회, 재부함안군향우회, 재창원함안향우회등 향우회가 열리면 초청장을 보내와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고 있다.
참석하여 경향각지에 살고 있는 향우님들을 만나 고향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고향에 대한 추억과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을 자주 듣게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고금을 통틀어 여전한 현상인 것은, 고향은 인생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고향 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더욱 그립다.
서울에 살며 경기도 안성시에 고향을 둔 사람보다 경남 어느 곳에 고향을 두고 있는 사람이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은 고향이 먼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4,5시간이면 함안에 갈수 있지만 예전에는 보통 고향나들이 하루걸이였다.
함안은 지금 교통의 사통팔달로 고향산천이 변모를 거듭하고 있지만 예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고향은 까마득이 멀고, 안타깝고그립다.
향우들 대부분이 굳이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아니더라도, 여생만은 고향에서 보내고 싶은 꿈을 가진다.
10여년전 당시 군수께서 함안출신 재일교포사회에 초청받아 다녀와서 우연한 기회로 대화를 나누면서 일본 동경과 오사카지역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1세대들이 30~40명이 고향으로 와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부지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들은 10대중반 또는 20초반의 나이에 선진국인 일본에서 돈을 벌기위해 밀항선을 타고 가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등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자수성가한 분들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군수님이 당담부서와 여러 군데 장소를 물색하여 계획을 추진했지만 성사가 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70대이상 향우1세대들은 이제는 인생의 노년기를 맞이한 사람들이다. 그나마 1.5세대 40~50대 장년들이 그 뒤를 따라 고향사랑운동에 나서야 하는데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뿐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다.
재경함안군향우회. 재부산함안군향우회, 재창원함안향우회, 재양산함안향우회, 재거제함안향우회, 재김해함안향우회가 결성되어 이들 지역에 살고 있는 향우가 대략 60만 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향우들의 고향사랑운동 같은 것도 앞으로 길어봐야 20년 안팎 일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 향우1세대들의 고향은 갈수록 간절해지고 고향에 대한 관심도 더더욱 깊어진다.
고향함안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고 고향이 그립다. 그러나 막상 고향에 가보면 딱히 할 일도 없고 반기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자꾸 고향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그 곳이 정겨운 고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향우회에서 단체로 고향나들이에 직접 다녀온 사람들 중, 열에 일곱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하다. 향우들 대접이 형편 없었다. 숙박시설도 없이 다른 지역에서 잠을 청하고, ‘향우회만남의 장’ 행사장에 자리배치와 의전등 향우들에게 전혀 배려가 없다는 등의 말은 수도 없이 회자되는 불평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도 고향으로 달려가고 또 고향을 생각하는 것은, 그 상처가 바로 나의 상처이며, 그곳의 그늘은 곧 나의 그늘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곳이 바로 내 삶이 시작된 어머니의 품안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함안군민과 출향향우와의 하나 되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 기실 지방자치시대에 함안발전은 함안군민 뿐만 아니라 향우들의 도움과 참여로 인해 더욱 알차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진정으로 함안군이 출향향우들과 하나 되는 결실을 보려면 함안군이 향우들에 더욱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져야하고, 향우들도 고향의 실체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함안군민과 함안 출향 향우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