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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선비의 절개를 만나다

'작은고려' 산인면에 고려동 유적지

기사입력 2016-02-0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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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고장이 충절의 고장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함안이야말로 고려, 조선을 거쳐 충신이 즐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와 여러 의병장이 힘을 합쳐 왜적의 진격을 막아냈으며, 전국 최고의 의거로 평가받는 3·1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등 역사로써 충절을 증명하고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다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 함안에 고려동(高麗洞)을 세우고 자신이 한 일이 없다며 유언으로 글자 하나 없는 백비를 세우게 한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이야말로 충절의 대명사로 존중받아야 할 인물이다.

특히 모든 사람이 사후에나마 자신의 행적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오히려 나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얼 쓰겠냐며 백비를 세우게 한 그 정신이야말로 선비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함안을 대표하는 충절의 표상이 되고 있다.

선생은 재령인(載寧人)이며 성균관 진사로 고려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뛰어난 기개가 있었고 세속에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일찍이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 있으면서 학문에 독실해 당시의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니 포은(圃隱) 선생께서 벼슬하기를 권하자 대답하기를 ‘시기가 적절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고려가 망함에 이르러 사(社)가 옥(屋)이 되니 제현(諸賢)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결의를 표명했다가 다시 함안으로 내려와 산인면에 고려동을 짓고 은거했다.

함안은 고려 16공신의 한 사람인 이방실 장군과 위화도 회군을 반대한 조순 장군이 태어난 곳이고, 자신과 막역한 금은(琴隱) 조열(趙悅) 선생이 기거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군북면 명관리에서 태어난 금은(琴隱) 조열 선생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의 낙성식에서 거문고를 타줄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고, 나중에 정종이 태조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한 것도 거절해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후 군북면(郡北面) 원북리에 은거했다.

모은금은, 합천에 은거한 만은(晩隱) 홍재(洪載)영남의 삼은(三隱)으로 칭하고 있다.

만은(晩隱)

  ▶모은선생의 묘비

선생은 합천 가회면의 운구대(雲衢臺)에서 시를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 1786년에 운구대 옆에 운구서원을 세워 영남 삼은을 봉향하다가 훼철된 후 지금은 운구서당이 세워져 있다. 모은 선생은 자신이 끝까지 고려 왕조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담 밖은 신왕조인 조선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유민의 거주지인 고려동임을 표방했으며 고려동 앞의 고려 전과 고려 답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자급자족하고 조선의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후에 태조(太祖)의 조정(朝廷)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또 아들 개지(介智)에게 경계하기를 “너 또한 고려 왕조의 유민이니 어찌 신왕조에 벼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 절대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또 내 신주도 고려동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유명에 따라 아들 개지는 끝내 신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한평생을 마쳤다.

또 모은 선생은 유언을 남기기를 “내가 죽으면 할 수 없이 담장밖에 장사할 것인즉 혹 조선 왕조의 땅에 묘비를 세울 경우에 나라를 잊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는가, 나의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한자 새기지 말라.”고 해 자손들이 묘비를 글자 한자 없는 백비(白碑)로 세웠다. 이 백비는 가야읍 혈곡리 인곡 저수지 윗편, 인산재(仁山齋) 뒷산에 있다. 비(碑) 모형은 장방형으로 윗편에 연꽃무늬 갓을 씌웠으며, 화강암 재질에 전체의 높이 95cm에 갓이 15cm를 차지하며, 넓이 40cm, 두께15cm로 갓과 함께 통돌로 되어 있다. 우측 아랫부분은 뒤가 파손되어 두께가 8cm이며, 갓의 넓이는 45cm로 아주 검소하고 작은 모양의 비석이다. 1만8,442㎡의 고려동 유적지는 1983년 8월 2일 경남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이곳 고려동 유적지에는 모은 선생이 이 곳에 와서 나라를 잃은 고신(孤臣)이 부국(扶國)하지 못한 마음을 한으로 씻으며 숲속에 자미화(百日紅)가 만발(滿發)한 것을 보고 아침 저녁으로 거닐면서

滄溟夜夜迎孤月(창명야야영고월) 밤마다 바다에서 뜨는 외로운 달을 맞이하면서

杞鞠年年闢小畦(기국연연벽소휴) 해마다 구기자 국화 심을 작은 밭을 개간하네

回首未逢堯舜世(회수미봉요순세) 돌아봐도 요순시대는 만날 수 없으니

甘心不讓牧樵儕(감심불양목초제) 목동과 나무꾼 동무됨을 만족하게 여기네

라는 시구(詩句)를 읊으면서 자신의 슬픈 회포를 달래던 자미단(紫薇壇)과 순조(純祖) 33년(1833)에 선생의 14세 후손인 유호(有顥)가 창건한 자미정(紫薇亭)이 있다.

또한 모은 선생이 터를 잡아 지은 종택(宗宅)과 손수 농사일을 하며 자급자족을 했던 99,000여㎡의 고려 전답(田畓), 고려동 담장, 율간정(栗澗亭) 등이 있다. 모은의 현손부(孫婦) 여주이씨가 몸이 아픈 시어머니를 위해 지극 정성 기도하자 전복이 나왔다고 하는 복정(鰒井)이 있다. 이 복정은 600년 전 모은 선생이 파서 사용한 것으로 어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 영남 삼은이 단구(丹邱) 김후(金後 金厚)와 함께 한 구절씩 지은 시(詩)가 전한다.

幽篁園裏數叢花(유황원리수총화) 깊은 대밭 속 대여섯 떨기 꽃이

潤色山村寂寞家(윤색산촌적막가) 산촌 적막한 집에 색을 더하고

入室更看樽有酒(입실갱간준유주) 방안 술동이에 술 있는 걸 보니

宦情從此薄於紗(환정종차박어사) 벼슬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네.

 

두문동서원은 표절실(表節室)에 순절(殉節), 항절(抗節), 정절(靖節)의 3반(三班)으로 나누어 제현을 봉안하고 있는데, 선생은 항절반에 봉안 되셨다. 또 함안의 인구서원(仁衢書院)에서도 향사(香司)하고 있다.

한편 두문동서원은 두문동 이외의 제현도 모시고 있는데, 조열 선생은 항절실 항절반에 홍재 선생은 정절실 정절반에 봉안 되셨으며, 2012년 두문동서원지 중 선생에 관한 부분을 초역(抄譯)한 책이 나와 그 충절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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