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도서가 있기에 오늘날의 김윤환이 있습니다. 영광도서는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제 영광도서는 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부산시민의 품에서 지키고 가꿔갈 문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성장이 이어지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영광도서를 국내 최고(最古), 부산 최대(最大) 서점을 넘어 부산 랜드마크로 성장시킨 김윤환 대표이사는 유능한 서점경영자에서 이제 부산의 오피니언 리더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서점을 통해 얻은 영광을 잊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말한다.
가난한 농촌의 중졸(中卒) 출신인 그는 세파와 인고의 세월을 극복하고 경영학박사로서 현재 부산시 새마을회 회장, 부산불교실업인회 회장, 목요학술회 부회장, 부산을가꾸는모임 공동대표, 민주평통부산진구 회장, 재부함안군향우회 차기회장 등등 각계의 지도자로서 굵직한 명함을 갖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새마을훈장, 부산문화대상, 자랑스러운부산시민상 대상, 부산산업봉사대상, 부산문화대상, 자랑스러운 동아대 동아인상, 자랑스러운 함안인상 등 지면을 가득 메운 표 · 수상 기록은 그의 인생을 대변한다.
필자는 <내 고향 함안> 발간에 즈음해 ‘기업탐방’으로 영광도서 김윤환 재부함안군향우회 차기회장을 찾아 입지전적 인물로 향우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그의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본다.
농촌에서 야망을 키우는 소년 김윤환
두메산골인 경남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는 그의 안태고향이다. 11대조부터 이곳에 정착했으며 그 윗대 선조는 의령군 지정면에 산소를 모시고 있다.
뿌리에 대한 의식이 남다른 그는 숭조정신을 덕목으로 가화만사성을 강조한다. 6남 3녀 중 귀염둥이 셋째아들이었지만 가난한 농촌에서 안 해본 일이 없단다.
“쟁기질, 서리질도 해보고 방학(중) 때는 늘 나무하러 다녔다”며 “어릴 적에 제일 부러웠던 것이 구루마(달구지) 타고 나무하러 오는 사람들이었다”고 상기(想起)한다. 당시는 땔감을 구하러 먼 곳으로 다녀야 하기에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달구지를 몰고 다녔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공부는 제대로 못 했다.
아침 일찍 소 먹이고, 풀 베고, 학교 갔다 오면 농사일 거들어야 하고 놀 틈도 없었다”는 그는 “농사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논두름(두둑)하는 일이었는데 삽으로 하다보니까 허리가 정말 부러질 정도였다.
내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나중에 아버지께서 동생보고 삽을 허리띠로 묶어 앞에서 당겨주라고 하셔서 훨씬 수월해졌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그는 또 “그때는 논매기를 손으로 했는데 두벌메기 할 때는 벼가 자라나 눈을 찔려가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고 기억한다. “특히 보리논에 독새(둑새풀)는 매도매도 끝없이 자라고 밖에 던져놔도 되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며 “겨울 방학 때 다른 애들은 제기차고 노는데 우리 형제는 그 추위에도 밭 매러 다녔다”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상념에 젖는다.
그 당시 농촌생활이 대부분 끼니를 걱정할 때라 그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면서 보릿고개 때는 무밥으로 끼니를 때웠었다. 그의 부친은 한학자로 지역에서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농사일은 어머니와 자식들의 몫이었다. “일제 때에도 사랑방에서 야학으로 마을청년들에게 명심보감, 주역 등을 가르쳤다”는 그에게서 인터뷰 내내 부친을 공경하는 마음이 묻어나온다. 그는 “짐은 어깨에 맞추어서 져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오늘날까지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산간벽지를 탈출하다
“가정형편으로 고교 진학은 포기했다. 큰형님께서 학비를 대주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께서 농사일을 누가 하느냐고 걱정하시고 나도 사실 공부에 애착이 없었다”는 그는 졸업 후 농사일에 전념한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꿈틀 그리며 그의 야망을 자극한 것이다. “토요일만 되면 마산으로 진학한 애들이 오는데 ‘高’ 자 붙은 모자에다 여학생들은 교복의 하얀 칼라가 햇볕에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었다.”
소년 김윤환은 자신의 모습에서 미래를 그려보고 자각을 하게 된다. 도시로 탈출할 결심을 굳힌 소년은 1966년 설날을 쇠고 귀성한 친구를 따라 무작정 부산으로 가출한다.
“그 당시 전철이 다녔는데 호구지책은 마련해야겠기에 친구가 길 잃는다고 우려했지만 서면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사실 당시 전포동 산비탈은 문패도 없고 집들도 비슷해서 간혹 길을 잃고 헤맬 때도 있었다.”
소년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어린 그에게 일자리가 쉽지 않았다. 그때 도서관(현 부전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부친으로부터 배운 명심보감과 어깨너머로 익힌 한문 실력을 믿은 그는 도서관 급사라도 사정해봐야겠다며 작심하고 찾아갔다.
일주일을 찾아다니며 사정을 했지만 “어렵다”는 답변만 메아리 되어 왔다. 소년의 끈질긴 호소에 그 아저씨(지금 생각하니 경비였다)가 일자리 정보를 줬다.
“글을 안다니까 대한극장 뒤편과 부산상고쪽에 가면 헌책방이 많은데 거기 가서 한번 알아봐라.” 소년 김윤환의 운명이 결정되는 일자리가 그곳에 있었다. 소년은 중학교 때 도서부원을 맡은 적이 있으며, 특히 한글날 백일장에서 장려상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서점 일이라면 자신 있다.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소년은 한걸음에 달려갔다. 근처를 기웃거리자 ‘함안서림’이라는 조그만 간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살며시 문을 열었다.
인자하신 사장님의 눈길이 소년의 아래위를 훑는다. “사장님, 월급은 필요 없심더~ 먹고 자게만 해주이소” 그의 통사정을 들은 사장은 군용침대를 구해주며 지내보라고 한다. “점원은 필요 없는 데 사정이 그렇다니…” 알고 보니 큰형 친구였다.
“헌책방 한구석에서 야전침대로 28일 동안 생활했다”는 그는 그곳에서 고서적 유통에 눈을 뜬다. “그 당시는 헌책이 많이 유통됐는데 그중에는 문집 등 고서로서 가치 있는 책들도 섞여 있었는데…” 그는 유통과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사업성을 판단한다.
“이 사람들(헌책방 주인)은 한문을 잘 몰라 고서보다는 교과서나 참고서를 위주로 팔고 있다”며 고서적 판매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고향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사업자금이 필요해서다. 그는 중학교 실과시간에 닭․돼지 예방주사를 놓는 법을 배워 인솔교사를 따라 지역에 봉사활동을 다녔었다.
이때 조금씩 받은 용돈으로 그는 병아리를 샀다. 형제들이 용돈으로 병아리를 사서 함께 길렀는데 각자 발목에다 노란띠와 검은띠 등으로 표식을 했었단다.
“내가 부산 올 당시 15마리로 중닭 정도였는데 그걸 팔아서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는 그는 형님의 답장을 받는다. 객지에서 고생하지 말고 형이 공부시켜줄 테니까 고향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결심을 굳힌 그는 깨알 같은 글씨로 꼭 성공해서 가겠다는 편지를 다시 보낸다. “결국 어머니께서 5천 500원을 보내왔다”며 “그 돈으로 중고 자전거를 2천 500원에 사고 나머지는 장사 밑천을 했다”는 그는 회상에 젖어 두 눈을 감는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의 모습에서 극진한 가족 사랑이 느껴졌다.
그는 그때부터 서점경영의 노하우를 쌓기 시작한다. 먼저 폐지상 중에도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고서들을 별도로 모아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이 모아둔 헌책들을 선별 수집했다.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나는 점포가 없으니까 서점에 바로 넘겼다. 보수동에도 가져가고 서면에도 가져갔다. 가치가 있는 책은 별도로 묶어서 함안서점에 보관했다가 서울 수집상이 내려오면 팔았다”는 그는 “진짜 10원 주고 산책이 몇백 원에 팔리기도 했다”며 당시의 즐거움을 상기하고 환하게 웃는다.
“시골에 있는 동생들도 불러 함께 열심히 뛰었다. 현재 그 동생이 반송 영산대학 앞에서 큰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서점을 경영하고 있단다. 그 밑에 동생도 남포동에서 남포문고를 경영하고 4형제가 서점경영으로 성공한 서점가문이다.
영광도서의 닻을 올리다
“급행장 앞 도로가 옛날 서면중앙시장 상가였는데 복개천 끝나는 부분 담벼락 끝에 서가를 짜가지고 창고 겸 점포로 사용했다”는 그는 1967년 처음으로 1.5평짜리 점포를 얻어 ‘영광서점’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당시는 사업자등록증도 없고 신고도 없는 그냥 난전이었다고 한다. 1968년 5월 1일 드디어 영광서점이 공식적으로 출발한다. ‘급행장’ 건너편에 5평의 점포를 얻고 영광서점 간판을 달았다.
그는 “영화 영(榮)자와 빛 광(光)자를 쓰는데 종이의 원료가 나무이기 때문에 나무 木자가 들어가고 불로서 나무를 태우니까 불 火가 들어간 한자를 찾아 썼다”며 “나무가 책으로 만들어져서 불같이 일어나고 지식을 공급해 빛나는 서점이 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풀이한다.
그의 부친으로부터 일찍이 한자를 익힌 덕에 상호를 직접 작명하고 뜻까지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한글로 영광서점을 쓰고 그 밑에 한문을 넣었는데 지금도 벽면에 ‘榮光圖書’를 한문으로 새겨두고 있다”는 그는 “원래 ‘영광도서전시관’으로 명명했었는데 너무 길어서 법인명을 영광도서로 했다”고 한다. 영광도서전시관이라는 상호도 그의 경영철학이 담긴 이름이다.
“규모가 커지면서 직원이 필요했지만 아직까지 수지가 맞지 않아 직원 대신 무인판매를 시도했다”는 그는 전시관이란 간판을 붙이고 책을 마음대로 보고 필요하면 사가라는 판매전략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몇 달 운영해보니까 분실되는 책이 너무 많아 부득이 점원을 늘리고 간판을 영광도서로 바꿨다고 한다.
그의 경영 노하우는 남달랐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기술이 국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역점 정책을 펼칠 때 그는 기술 · 기능사 자격시험 관련 책자를 중점적으로 취급했다.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공업고교를 찾아다니며 샘플 도서를 보여주면서 교재로 채택하도록 설득해 집중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성실과 신뢰가 바탕이 된 그의 경영철학이 서점경영의 성공비결 중 하나였다.
서점이 지역브랜드로 우뚝 서다
그는 “당시 헌책방이 68개, 신간서점이 6곳이었는데 현재는 우리밖에 없다”며 서점 경영자들의 수동적 · 소극적인 경영방식이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서점 경영의 청사진을 그리던 그는 헌책에서 신간 판매로 경영전략을 바꾸게 된다. 기술서적은 대부분 신간으로 헌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삼륜차 한 대 분량의 책을 기증했는데, 그전에도 고향 학교와 도서벽지에도 보내고 했었다”는 그는 영광도서에 단골로 출입하던 언론사 기자들에게 부탁해 기증할 학교를 추천받았다.
“경남교육위원회에서 욕지중학교를 선정해줬는데 당시는 도서 기증이 큰 이슈로 각 매스컴에서 특집으로 소개해 줬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언론의 홍보로 고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의 서점 성공경영 스토리가 또 하나 생긴 것이다. 그는 당시(1975년) 충무시교육장으로부터 받은 감사패를 꺼내 보이며 처음으로 받은 것이라 소중하게 간직한다며 미소를 짓는다.
“그때 내 재산의 1/3을 기증했는데 순수한 마음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다. 이를 계기로 교도소 같은 어려운 시설에 많이 기증을 했지만 마케팅적 의도였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순수한 독서권장 마음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게 된 것이지만 오히려 홍보가 돼 매출이 늘어났다.
영광도서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발품도 일익을 했다. 당시 부산에는 전문서적이 별로 없었다. 그는 손님이 주문하면 서울까지 가서 구해 줬다.
“그 때는 지역서점에서 10〜15% 할인판매를 했는데 서울에서는 정가로 구입해 와서 어쩔 수 없이 할인판매를 했다. 계산적으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가 없다. 하지만 서점이라면 서점 역할을 해야 한다.”
그의 지론은 “서점에서 없는 책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고집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미담사례가 각 매스컴을 타고 ‘영광도서에 가면 없는 책이 없다’는 입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최고의 호황기를 맡게 된다. 이제 누구나 서면의 약속 장소는 “영광도서 앞에서 만나자”고 할 정도로 서면 랜드마크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는 여담으로 “20대에 이미 경영학 박사의 길을 실천했다”면서 호탕하게 웃는다.
사회봉사활동 참여는 독서 캠페인의 하나다
“나는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업을 하지 않았다. 사람은 그릇이 있다. 10억 그릇은 20억 벌어도 돈은 빗물과 같아 그릇이 샌다.”
김 회장은 ‘서점다운 서점을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책을 많이 전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매년 한 평이라도 늘려서 보다 많은 책을 비치하려 노력했다.
그가 직접 망치를 들고 부인이 톱질하며 밤새 진열대를 만들기도 했단다. 그는 많은 서적을 확보하고 싶었지만 공간부족, 자금부족으로 가슴앓이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우범 지역이라서 서점이 안 된다는 선입견으로 도매상에서 ‘책을 공급 못 해주겠다’고 나올 때는 정말 하늘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그 당시 서면은 유흥가 밀집 지역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3개월 만에 외상매입금을 모두 갚는 쾌거를 이뤄낸다. “IMF 때도 힘든 건 사실이지만 지금도 서점경영은 어렵다. 직원들과 공개적으로 경영정보를 공유한다.”
현재의 경영상황을 묻자 그는 서슴지 않고 말한다. “수익을 생각한다면 서점을 축소해야 한다.
하지만 서점은 수익보다 내 인생이고 지역의 문화 봉사다.” 주변에서는 “서점 적당히 하면서 주차장은 1층만 하고 빌딩을 건립하든지 임대를 주면 엄청난 수익이 될 텐데 바보같이 하느냐”고 핀잔을 준단다.
“1993년 책의 해에 ‘문화사랑방’을 만들었는데 당시 550만 원의 월세를 받고 있었지만, 오히려 2천만 원을 더 투자해 시설을 만들고 문화행사를 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보람을 얻고 있지만, 당시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난을 받았었다.”
오직 서점을 키우기 위해 애를 쓰다보니까 그 집념이 구현돼 지금은 건물 3개 동에 직원이 90여 명이며, 45만여 종의 서적에, 120만여 권의 책이 진열된 메머드급 서점으로 성장했다. 그는 “서점을 통해 얻은 영광인데 서점을 배신할 수 없다”며 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100년 이상 가는 서점으로 대를 이어 지속시킬 각오를 하고 있다.
차라리 다른 수익사업을 해서라도 영광도서만큼은 꼭 지켜낼 것이라고 다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란 것을 강조하며 살아남는 쪽으로 선택하겠다는 각오다.
하면 할 수 있다
“‘하면’이라는 말은 출발을 의미한다. 즉 출발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평소 실천하는 말로 영광도서의 사훈이다. 직원들이나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잊지 않는다. “사람은 샘(원천)이 있어야 한다. 즉 자기의 마음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리가 있어야 하고 돈을 쫓으면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뿌리(고향)를 망각하면 원동력을 상실한다.”
그는 나이 오십, 지천명에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사회활동을 하면서 학력 콤플렉스를 느낀 것이다. 그가 밝힌 에피소드다. “객지에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는 폭넓은 교제가 어려웠던 시절인데 독서캠페인도 할 겸 JCI에 가입했다. 열심히 활동하면서 임원을 거쳐 회장에 출마했는데 학연도 지연도 없는 처지에 학력이 중졸이라는 이유 등으로 낙선했다. 사회생활이 능력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동안 잊고 지냈지만, 사회생활은 그의 자존심을 계속 자극했다. 결국 검정고시를 계획하고 독학으로 주경야독을 했다.
평소 독서를 가까이 한 덕분에 4개월 만에 영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에 합격한다. 그다음 해에 영어를 패스하고 내친김에 대학진학을 결심한다.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일본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던 차에 마침 방송통신대학교에 일본학과가 개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1기로 입학하게 된다.
4년 만에 졸업한 그는 만학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않고 부산외국어대 국제경영대학원 · 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받는 기염을 토하고,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영광을 안는다.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되는 그의 포부가 궁금했다. “정치? 아직은…” 그의 꿈은 부산에 ‘책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란다. 부산이 책과 함께하는 문화도시로 발전하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차기 재부함안군향우회를 어떻게 견인할지에 대해서 물었다.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향우라는 뿌리 의식과 동질성을 자산으로 결속력을 높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서로 믿고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고, 특히 함안군향우회 회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함안인의 전통을 세우고 싶다.”
그는 준비된 차기 회장으로서 소신을 밝혔다. 강호춘 상임부회장이 밝힌 김 회장에 대한 소감이다.
“김 회장님은 정직하시고, 매사에 능통하며, 후배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깊다. 재부함안군향우회 선배라는게 향우인들에게 자랑거리다. 정말 존경하는 선배이시다.”
사업파트너로 ‘도반’이 있었다
1973년 5월 19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그에게 평생 도반이 생겼다. 제주행 비행기가 뜨지 못해 결국 서울행 기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대신했다. 부부는 열차 안에서 하나의 약속을 한다.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자는 것이다.
“그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는 그는 “부부는 먼 길을 가야 하는 도반이다. 날마다 잔칫날일 수 없는 길을 함께 가야 한다. 가까워지면 무례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고 그의 수필집 <천천히 걷는 자의 행복>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오늘의 영광도서가 있기까지는 그녀의 역할이 컸다. 사업에 대한 내조자가 아니라 사업파트너로서, 공동경영자로서 함께 달려왔다”며 “결단력이 필요할 때 용기를 주고, 힘이 필요할 때는 지혜를 주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앞장서 갈 때는 뒤에서 밀어 주고 뒤쳐져 올 때는 당겨주었다”고 아내를 소개한다.
그의 아내 이경순 여사는 사진작가다. 그것도 연꽃 사진을 주로 촬영한다. 불자인 그의 도반으로서 연을 통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겠다는 마음이란다.
그녀는 현재 부산대 대학원에서 미학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시를 공부하고 있다. 사진에 덧붙일 시를 쓰기 위해서란다. 그들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그는 아들이 가업을 잇기 위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고 자랑한다. 딸은 결혼해 미국에 살고 있다.
김윤환 회장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은 163회째를 맞는 영광독서토론회로 1993년 책의 해에 시작해 올해로 21년째이다. 부산기네스북에 오른 영광독서토론회는 2만여 명이 참가한 국내문학토론회의 전범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동안 이문열, 신경숙, 조정래 등 유수한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한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서토론광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작가와의 대화․독서감상문 현상공모․일본어학당․사진학당․시낭송회․부산시민교양강좌․문화사랑방․영광도서문화원․영광도서갤러리 등을 운영하며 부산시 도서문화산업을 견인하고 있다.
글/ 전병열 정치학 박사ㆍ동아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초빙교수
<김윤환 회장 약력>
경영학박사, 부산시새마을회 회장, 부산불교실업인회 회장, 목요학술회 부회장, 부산을가꾸는모임 공동회장, 민주평통부산진구회장, 재부함안군향우회 차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