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래-문화대안학교 교장/본지 논설위원
중산층의 조건이나 정의로 주거 공간, 수입과 지출, 문화적 수준, 국가적 의무 등을 제시한다. 수입과 지출은 균형적 비율이 있어야 하고, 부채비율도 적정성 이하를 제시한다. 이러한 경제적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문화적 수준을 충족하고 국가적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이를 테면 문화적 수준으로 연중 숙박을 겸한 여행의 횟수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 영화나 연극의 관람, 문화재 감상, 월 평균 독서량 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국방이나 납세의 의무에도 위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3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산다는 외형적 조건만으로는 중산층의 삶이라 할 수 없다. 아울러 고위층이라 함도 단순히 재산과 직위의 높음으로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 평은 1.8m𝞦1.8m를 말함이니 찜질방의 캡슐형 숙소는 한 평이 채 안 되는 넓이쯤 된다고 볼 수 있다.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쉬는 공간은 한 평이면 되니, 죽어서 한 평도 채 차지하지 못하는 인생사라고 말들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러시아 민화집에 땅을 많이 갖고 싶은 사람이 해기 지기 전에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걸음을 재촉하다가 지쳐 쓰러져 죽고 마는데, 이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바흠(주인공)의 하인은 괭이를 들고 주인을 위해 구덩이를 팠다. 그 구덩이는 바흠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단 2미터의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문화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은 더 넓은 공간에서 더 큰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는 주거공간에 대한 욕구로 드러나서 연탄불을 때면서 살던 6평, 10평 아파트가 IT기술을 접목한 100평, 200평 아파트로 전진하게 된 것이다. 예전의 주택들은 발뒤꿈치를 들면 담장 밖이 보이고, 지나가던 사람도 발뒤꿈치를 들 정도면 집 주인과 안부와 음식을 나눌 수 있었다. 그 정도의 담장이면 열림과 폐쇄의 중간, 그러니까 집의 프라이버시도 지키고 바깥세상을 공유하는 높이가 된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담장 밖의 자연도 자신의 정원으로 생각하면서 정서적인 집의 평수가 넓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바람도 함부로 들이지 않는 아파트 문화는 오직 제 것만 제 것이니 집의 평수 넓히기를 행복의 척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작은 집에 살면서도 넓게 사는 법이 있다. 자녀들도 많은 집이지만 좁게 산 기억이 별로 없는 경우는 오글오글 좁은 방에 잠만 자고 나면 집을 나선 아이들은 골목이 마당이 되고, 학교나 들판이 놀이터가 되니 분명 좁은 집에 살았는데 그것이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지 않는 것이다. 담장을 높여 내 것을 막으면서 그곳에서 모든 것을 누리려는 특권을 의식하면 집은 넓어져야 한다. 아파트도 내 공간을 중시하는 순간 남의 것에도 침범할 수 없고 내 것이 더 넓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초가삼간이면 방이 하나고 부엌과 마루가 달려 있다. 방은 하나라는 점이다. 그러나 장독은 마당에 있고, 김칫독은 뒤꼍에 묻어 두었고, 배추나 무, 고구마는 마당 구덩이에 두었다. 지금은 큰 냉장고는 편의점에 두고, 세탁기는 빨래방에 두었다. 마당에 연못을 두고 산책하던 양반들은 뒷산을 오르거나 넓은 호수를 돌면서 걷고 있다. 지금의 집보다 훨씬 넓게 사는 비결을 실천하는 것이다. 직장 일로 바쁜 사람들은 차박을 하는 경우나 텐트를 이용한 캠퍼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주변의 캠핑장을 가보면 주말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코로나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 경우도 있겠지만 코로나가 종식 되어도 이 캠퍼들은 크게 줄지 않은 것 같다. 도시의 접은 공간을 더 넓게 사는 방법을 알아버린 것이다.
등기상의 소유가 아닌 공유로서의 소유는 마음도 몸도 모두 넓어지고 여유로워진다. 작은 집을 넓게 살려면 불필요한 것 줄이기, 필요한 것은 정리정돈과 수납하기 등의 기술적인 면도 필요하겠지만 자연을 공유함으로써 마당과 집이 넓어지는 마술을 즐길 수 있다. 내 집의 마음의 울타리를 허무는 순간 저 산과 들은 내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