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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3-09-2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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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의 ‘아름’에 대하여

기사입력 2020-09-2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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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래-문화대안학교 교장/본지 논설위원

 

잎을 떨어트리고 가만히 숨 쉬며 쉬고 있는 대지를 검은 땅이라 했다. 죽음의 땅이라는 말이다. 적어도 모든 생명을 부활시키는 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죽음의 땅처럼 보인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 일어나거나 예상보다 큰 긍정적인 성과가 일어난 경우에 기적이라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를 재앙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봄의 기적에 감탄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겨울의 검은 땅에서 온갖 만물이 되살아나는 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예기치 못한 상황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라 기적적인 일의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봄을 맞는 마음은 설렘으로 벌써 마음조차 아름다운 것이다.

원시시대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당연히 생산이었다. 한자의 美는 羊+大의 결합으로 큰 양이라는 뜻이 되는데 생존이 최대의 생활과제였을 시대에 먹거리가 풍부함은 절실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배를 채우는 것이 지상의 행복이었을 시절이다. 한글로서의 ‘아름’의 어원은 서지학적 확인에 의하면 알밤에서 왔다. 알밤>알왐>아람>아름으로 변천했다는 것이다. 한 대학의 축제 이름이 아람축제인데 가을에 열리는 것이다. 붉은 색을 약간 띤 짙은 밤색의 알밤 두 개가 꽉 찬 밤송이를 보면 마음이 환해지는 즐거움이 있다. 땅은 태풍에 미처 익지 못한 열매를 떨어트린 것과 하늘이 흔전만전 비를 뿌린 장마에 밭의 한 귀퉁이가 쓸려가면서 뿌리째 떠내려간 과실나무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낙엽을 떨어트리며 한해를 마무리하며 휴식을 시작하면서 결실한 과수나무를 토닥일 것이다. 결국 알밤에서 유래한 ‘아름’은 명사이고 학생답다, 어른답다 처럼 접미사 ‘~답다’와 어울려 ‘아름답다’로 쓰이는 것이다.

한편 beauty가 과도하여 자기과시의 상태에 이른 것을 럭셔리라고 하는데 이 럭셔리의 어원은 놀랍게도 바람난 여자다. 천주교에서는 이런 무절제한 생활을 뜻하는 럭셔리는 7대 죄악 중에 하나이다. 제 처지를 과시하고, 지나친 ‘아름답다’에 경계를 준 것이다.

사계절이 독특한 풍경으로 나름대로 아름답지만 앞서 봄은 기적과 같은 계절이라 했다. 그 리고 가을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결실과 한 해의 마무리일 것이다. 산에만 한 번 갔다 와도 어름, 하늘호박, 귀감, 밤 등 먹을 것이 지천이라 시골인심도 달라지는 계절임을 실감할 수 있는 가을을 ‘아름’의 중심에 둔 것이다. 인간에게도 성장의 결과는 대견하고 아름답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을 보면 피난살이로 대구로 모여들어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등에 업힌 갓난아기의 머리통이 애호박처럼 대롱거렸다. 이틀 동안 몸조리를 하고 갓난아기를 업고 장삿길에 나섰다.’ 이런 갓난아이가 전쟁의 가난 속에서 풀코를 빨아 먹으며 천진했던 50~60년대 아이들이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아름답다. 옥은 다리로 무거운 함지를 이고 생선을 팔러 마을을 찾아 하루에도 수십 리 길을 목이 오그라들 정도로 힘든 하루였지만 팔던 생선 한 마리를 남겨 재비새끼처럼 입을 오므리고 기다리고 있을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드는 어머니는 아름다움으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숭고함이다. 자신의 애틋한 무능을 많이 먹으면 짜구난다, 식충이 된다며 넉넉히 먹이지도 못했던 그 부모님이 살던 집에서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낡은 것에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부모님의 삶이 아름다운 것보다 숭고하기 때문이다.

잔뿌리까지도 아리게 했던 지난겨울의 추위와 마치 분노라도 하듯이 더위의 노여움이 계속되었던 여름을 견딘 나무들이 대견하다. 이제 산과 들은 휴식과 여유를 즐기는 ‘아름’의 10월을 맞는다. 피아노 연주가 어울리는 봄이라면 가을은 바이올린의 선율이 제격이다. 떠나온 아픔도 떠나버린 것에 대한 미움도 남기고 간 사람의 쓸쓸함도 화음 없는 바이올린의 아리아에 실려 갈 것이다. 우산을 든 산책길에 물은 속삭이고 풀벌레의 울음까지도 반짝이는 갈대가 위로해 줄 것이다. 폭풍도 폭염도 바이러스도 ‘아름’을 생각하면 웃을 수 있다. 더 보탠다면 ‘아름’과 ‘숭고’가 하나 된 가을을 소망한다.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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