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호(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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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호 |
조임도(趙任道, 1585∼1664)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澗松)이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후손으로, 부친 조식(趙埴)과 모친 유상린(柳祥麟)의 딸 문화유씨(文化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았지만 스스로 뛰어난 인물이라 자처하지 않았다. 대신 함안을 자부하고 지역 문화를 사랑해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저술하는 업적을 남겼다.
금라전신록은 조임도가 함안의 역사인물을 소개하기 위해 저술한 책으로 소개된다. ‘금라’는 함안의 고호(古號)이고 ‘전신’은 사실을 전한다는 뜻이니, 후대 사람들에게 실제의 기록을 전하고자 기록한 역사인물 저작이라 하겠다. 귀중한 문화 사료로 ‘금라전신록책판’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이 책을 어떠한 생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짓게 되었는지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조임도는 금라전신록을 저술한 뒤 서문을 지어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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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문집 |
옛날 다섯 개의 가야국(伽倻國)이 있었고 우리 군(함안)은 그 하나를 차지했으니 금라는 바로 그 옛 이름이다. 산천이 정밀하여 인걸이 배출되니 수백 년간 의관문물의 성대함과 풍속예법의 아름다움이 울창해 볼만하였다. 임사의 난리(임진‧계사)를 겪으면서 유풍이 사라지고 문헌에 증험할 곳이 없어져 고을의 후생들이 비록 전대의 고적을 찾고자 한들 그 누가 무엇을 좇아 구하겠는가? 그저 다행이도 한강(寒岡) 정 선생(정구)이 편찬한 함주지(咸州志) 한 권이 병화에서 무사하여 고찰해 얻는 것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함주지에 실린 것은 인물‧산천‧풍토에 불과할 뿐이고 고금의 서적 따위는 다루지 않았다. 진사(임진‧계사) 이후 사적은 또한 함주지에 언급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가 ‘전신록(傳信錄)’을 저술한 이유이다.
-조임도(趙任道), 간송집(澗松集) 권4, 「금라전신록 서문(金羅傳信錄序)」.
조임도가 기록한 금라전신록 서문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함안에 대한 마음과 금라전신록을 저술하게 된 이유를 서술하고 있다. 함안은 아라가야 이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며 뛰어난 인물이 거듭 배출된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아름다운 풍속이 단절되는 아픔을 겪고 말았다. 이전 시기 정구(鄭逑)가 기록한 함주지(咸州志)가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새로운 이야기를 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후의 새로운 역사를 정리하고자 금라전신록을 저술했음을 밝힌 것이다.
조임도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금라전신록의 체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신록’은 상하(上下) 두 편으로 모두 목록이 있다. 그 하나는 사대부의 비명‧묘지‧행장‧제문 및 정사의 제영‧기‧서‧전‧찬을 수록했다. 다른 하나는 고금의 고을 사람들이 지은 시문‧서계‧부책‧소장을 두루 기록했다. 그 사람이 현달하지 못해도 시문을 아낄 만하면 그 시문을 아껴 그것을 채집했고, 시문이 공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애석해할 만하면 그 사람을 애석해하여 시문을 가져다 썼다. 사람과 시문이 모두 귀중해 차마 그것을 민멸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시문은 전하지 않지만 인물을 버려둘 수 없는 것도 있어 목록에 거두어 넣었다. 함주지를 근본으로 삼고 임진왜란 이후 보고들은 것을 참조해 이에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제목을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이라 하였다. 이는 한가로이 거처하며 병을 다스리는 가운데 벌인 한가로운 사업이다.
앞의 서문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금라전신록을 편찬한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함안 출신의 다양한 인물에 대한 기록을 수록했고, 모두 두 권으로 목록을 두어 편찬했다고 하였다. 하나는 사대부의 생애를 조명한 것과 삶의 공간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삼았고 다른 하나는 기타 고을 사람들의 다양한 시문 등을 취해 모았음을 밝혔다. 나름대로 설정한 기준에 근거하여 금라전신록을 편찬했고 함주지 이후로 기록되지 못한 사업을 완수한 사실을 언급했다.
조임도는 스스로 한가로운 사업이라 했지만 이는 사실상 겸사에 불과하다. 서문의 마지막에 진정한 의도가 드러난다.
비록 그러하나 기록 가운데 문장‧절행‧염퇴‧은덕이 훌륭해 칭송할 만한 자가 한둘이 아니다. 후대에 이 기록을 보는 자는 우러르고 상상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사모해 본받으리니, 문장은 나라를 빛낼 수 있고 행실은 몸을 세울 수 있으며 염치는 속세를 권려할 수 있고 덕은 명성을 이룰 수 있다. 그 나머지로 다시 고을의 지난 자취를 많이 알기에 충분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연후에 바야흐로 내가 마음을 쓴 것이 우연이 아니요, 한가로운 사업이 긴요한 사업이 됨을 믿으리라. 책이 완성되고 나서 기록이 없을 수 없어 그 전말과 대강을 취해 서문으로 삼는다. 기묘년(1639) 2월 초순, 고을 사람 용화산(龍華山) 늙은이 조임도가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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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라전신록책판 |
조임도가 지은 금라전신록 서문의 마지막 단락이다. 1639년 2월 금라전신록의 저술을 마치고 지은 기록임이 드러난다. 금라전신록을 편찬한 이유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함안 출신 명사들의 빼어남을 자부한 것이요, 후대에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출한 것이다. 마지막에 한가로운 사업이 긴요한 사업이 되리라고 하였으니 사실상 스스로의 업적을 자부한 것이라고 하겠다.
실제 조임도는 금라전신록의 저술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가 이룩한 성과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1631년 유진(柳袗)에게 보낸 편지에 부친 유성룡(柳成龍)의 「대소헌전(大笑軒傳)」을 보내달라고 부탁한 기사가 있다. 당시 금라전신록의 자료 수집을 모두 마쳤다고 하였으나 이로부터 8년이 지나서야 탈고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였는지 상상할 만하다. 한편, 이길(李佶)이란 인물은 함안의 명사로 추앙되었으나 1940년에 일어난 화재로 문집이 불에 타면서 저작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금라전신록이 그의 행적을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1969년 그가 살았던 곳에 검계정(儉溪亭)을 중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임도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금라전신록은 오늘까지 전해져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책판은 현재 함안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함안문화원에서는 번역 사업을 통해 번역본을 출판했다. 조임도는 생전 함안의 아름다운 산수와 걸출한 인물을 자부하며 “인걸지령(人傑地靈)”이란 말이 믿을 만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인물이 걸출한 것은 땅이 신령스럽기 때문이란 의미이다. 그의 생각이 금라전신록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으리라. 선현의 업적을 떠올리며 책을 꺼내들고 책장을 넘겨본다. 함안의 위대한 역사와 인물들의 자취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아, 성대하고도 성대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