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산인면 어느 마을의 일화로 적어 둔다. 굳이 산인면으로 지칭한 것은 전통적인 선비의 마을이 아니면 이런 재치 있는 일화가 구전되어 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마을에 친하게 지내는 대감 두 사람이 살았다. ‘여산’ 이란 대감은 권세를 조금 행세하려고 하는 사람이고, ‘하정’ 이라는 대감은 권세나 재산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두 대감은 아주 친하게 지냈다. 더구나 담을 사이에 두고 집이 나란하게 자리 잡고 있어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을 서로 함께 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하정’ 대감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옆집의 ‘여산’ 대감은 ‘하정’ 대감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기 일같이 장례를 돌보아 주었다.
그런데 세상 우정이나 인심이란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존해 있는 ‘여산’ 대감의 집은 권력과 재산이 날로 번창하여 그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의 어느 마을에서도 여산 대감을 따라 갈 수 없었다.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하정 대감의 집과 여산 대감의 집은 보이지 않게 멀어지게 되었다. 두 집은 남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어느 날, 하정 대감의 부인은 아들에게 말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아들에게 미안해 하는 표정이었다.
“아들아, 너희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적에는 여산 대감과 형제처럼 지냈는데 요즘은 우리가 이렇게 가난을 벗어날 수 없구나. 너를 서당에 보내기도 어렵구나.” “어머님, 걱정 마세요. 비록 아버지가 재산을 모아둔 것은 없지만, 학문을 많이 이루어 놓았어요. 서당의 훈장님께서도 간혹 아버지가 지으신 시를 읊기도 해요.”
“그렇구나. 너도 이제 장성해서 장가를 가야하는데.”
“어머님, 저는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는 장가를 안가요.”
아들은 어머니에게 위로의 말을 하면서도 과거 말만 나오면 가슴이 떨렸다. 옆집의 여산 대감의 아들이 입고 다니는 옷, 집안 살림을 보면 항상 움츠려 드는 열등의식을 피할 수 없었다.
“과거에 급제해서 꼭 오늘의 이 치욕을 벗어나리라.”
아들은 틈이 나는 대로 ‘사서삼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년 과거에는 꼭 급제하리라 믿고 부지런히 책읽기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헐레벌떡거리며 공부하는 아들 방으로 달려왔다. 어머니가 숨을 식식거리는 것으로 보아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 어머니가 좀체 당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들아,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어머니, 무슨 일인가요? 평소 어머니 같지 않게.”
“그게, 그게 말이야. 글쎄.”
“허, 참. 어머니도 말씀을 해보세요.” “여산 대감 모친이 며칠 전에 돌아가셨지.” “그렇지요. 그게 어째서요?”
“그 모친의 묘소를 너의 할아버지 묘소 옆에다 모신다는구나.” “세상에 무슨 그런 일이 있어요? ”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다. 그 산의 임자가 여산 대감이지 않니?”
“그래도 그렇지 할아버지 산소 옆에다 다른 할머니 묘소를?”
“아, 이럴 때 너의 아버지만 살아계셔도 여산 대감이 이러지는 못하실 텐데.”
아들은 읽고 있던 ‘논어’책을 덮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떨려 숨을 쉴 수 없어, 집안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도 숨이 쉽게 쉬어지지 않아 그는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뒷산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묘소 앞에 갔다. 그 앞에 묵묵히 서 있으려니 울음이 나왔다. 힘없는 손자가 할아버지 묘소를 지켜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니 울분이 차올랐다. 할아버지에게 사죄하는 심정으로 울음 섞인 말을 했다.
“할아버지, 아직은 힘이 없는 손자를 용서 하십시오. 아무리 우리 집안이 쇠하였다 하더라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는 머리를 묘소 잔디에 쿡쿡 가볍게 찧으며 한탄했다.
“먼저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 산소 옆에다 여산 대감 어머니 묘를 쓰다니요?”
아들은 할아버지 묘소에 절을 하며 무언가 깊이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그는 조금 전의 그 아프고 슬픈 얼굴이 아니고 이상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두고 보자, 너의 놈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너희 놈들이 선비라고 자처한다면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아들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집으로 돌아왔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무슨 결심이 있는지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이상한 행동을 보고 불안했다.
아들은 평소 같지 않게 방안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옷도 아주 좋은 명절 옷을 옷장에서 내어 입고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불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 괜히 묘소 이야기를 꺼냈다 싶기도 했다. 아들이 저렇게 괴로워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노래까지 부르니 정신이 이상해 진 것이다. 평소 그렇게 얌전하고 말이 적던 아들이 아닌가!
“이럴 어쩌나? 내가 방에 들어가서 말려야지.”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걱정되어 아들 방으로 들어가려했다. 그러나 아들은 방문을 안으로 굳게 잠가 두고 있었다. 방에서는 아들이 평소 전혀 하지 않던 이상한 춤과 노래가 계속 되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더 아들이 걱정되었다.
다음날 아침이다.
아들이 밤 새 핼쑥한 얼굴이 되었다.
아들이 아침도 굶은 채 어머니 방에 와서 큰절을 했다. 어머니의 불안한 마음이 더 해만 갔다. 아들은 평소와 달리 아주 묵직한 말을 한 마디 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서 느끼는 그런 결연한 표정이었다.
“어머니, 오늘 여산 대감의 모친 장례를 치르는 날입니다. 절대로 할아버지 묘소 옆에 못쓰게 할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할 것입니다.”
“아들아, 그러지 말아라. 지금 여산 대감의 권세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이다. 자칫 네가 미움을 산다면 이를 어쩌겠느냐? 더구나 우리가 담을 서로 이웃한 사이가 아니냐?”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설령 제가 조금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여산 대감께서 아버님과의 우정을 생각해서 함부로 못할 것입니다. 또 여산 대감이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닙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크게 숨을 들여 쉬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뒷산 할아버지 묘소 앞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명절에나 입는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미리 준비한 꽹과리를 손에 쥐고 치기 시작했다. 그 꽹과리에 맞춰 흥겹게 노래까지 부르며 춤을 추었다. 작은 골짜기에 꽹과리 소리, 노래 소리, 춤이 계속 되었다. 그 꽹과리 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춤이 나고 흥겨운 노래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온 골짜기가 축제의 마당 같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여산 대감 집의 상여가 산 중턱으로 올라왔다. 할아버지 산소 옆에다 묘소를 정하고 장례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아들은 그것을 모른 체 하고 꽹과리를 흥겹게 치며 춤을 추었다. 여산 대감이 이를 보고 하도 괴이해서 자기 집의 하인을 불렀다.
“여보게, 저기 가서 ‘하정’ 대감의 아들이 제 정신인가 알아보게. 이쪽에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장례 묘소 바로 옆에서 저렇게 꽹과리를 치고 춤을 추다니, 미친 짓이 아닌가?”
여산 대감의 하인은 재빨리 꽹과리를 신나게 치며 춤을 추고 있는 하정 대감의 아들에게 달려가 말을 걸었다.
“도련님!”
여산 대감의 아들은 일부러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체 하고 아주 흥겹게 꽹과리를 치고 춤을 추었다. 큰소리로 노래까지 불렀다. 아주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기분으로 노래를 불렀다.
얼마를 그렇게 했을까, 여산 대감의 하인이 화를 내며 하정 대감의 아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주 짜증난 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옆에 여산 대감의 장례식인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제서야 하정 대감의 아들이 뒤돌아보며 아주 유쾌하게 웃는 얼굴로 그 하인을 아는 체 했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하인에게 말을 걸었다. 금세라도 무슨 아주 기쁜 일이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 자네가 웬일로 이렇게 나를 찾나?”
여산 대감의 하인이 아주 화가 머리끝가지 오른 말투다.
“도련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정 대감의 아들은 숨을 고루었다. 절대로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는 자기 마음의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무슨 짓? 야, 이 녀석아, 우리 할아버지 묘소 옆에 너희집 할머니 묘소를 쓰는 짓은 바른 짓인가?’
그렇게 끓어오르는 울분의 말을 꾹 참았다.
하정의 아들은 봄꽃처럼 화사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머금고 하인에게 말했다.
“여보게, 여산 대감님께 말씀 드려주게. 내 일생에 오늘처럼 기쁜 일이 없다고.”
여기까지 말한 하정의 아들은 숨을 길게 쉬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아주 또랑또랑한 말소리로 말을 했다.
“어젯밤 꿈속에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바로 내가 서 있는 이 묘소의 할아버지가 나에게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왔다네.”
여산 대감의 하인이 무슨 말인지 정신을 못 차리고 무엇에 홀린 듯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 할아버지가 꿈속에서 활짝 웃으며 ‘내 옆 자리에 새 마님이 오시는 데, 그 마님과 결혼을 하게 된다.’ 자네 이 사람아 내 말을 여산 대감에게 전하게나. ”
하인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숨을 내쉬다 들여 쉬다 몇 번하고는 여산 대감에게 달려갔다. 하인은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를 몰라 더듬거렸다.
“대, 대감, 대감님. 하정 대감 아들의 ‘할아버지’가 어젯밤 꿈속에 나타나서 오늘 옆자리에 오는 그.....”
여산 대감은 갑갑했다. 벌컥 화를 내며 하인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말을 바로 하게. 꿈속에서 무슨 말을 한다든가?”
“예. 대감님, 꿈속에서 그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옆 자리에 새로 오는 마님과 결혼을 하게 된답니다. 오늘 할아버지의 결혼식 날이라서 너무 좋아 골짜기가 떠나가도록 저렇게 꽹과리를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 답니다.”
여산 대감이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여산 대감은 숨을 크게 내쉬고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여산 대감은 일꾼들이 열심히 묘소 일을 하고 있는 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주 풀죽은 목소리로 일꾼들에게 말했다.
“여보게들, 그 하는 일을 멈추게. 저쪽 앞산 양지녘으로 가세. 풍수가 이곳에 자리를 잡아주었지만, 아무래도 이 자리는 좋은 것 같지가 않네.”
묘소 일을 하던 일꾼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대감의 말인데 무슨 토를 달수가 없었다. 그들은 상여랑 여러 가지 연장들을 챙겨서 앞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날 밤, 하정 대감의 아들은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이웃 사람들에게 대략의 일을 들어서 알고 있는 어머니는 아들이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아무리 장성한 아들이지만 꼭 안아주고 싶도록 사랑스러웠다.
“아들아, 네가 정말 믿음직하구나.”
“어머니,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그늘입니다. 하늘 모르게 치솟는 여산 대감이 어찌 저 하나를 두려워했겠습니까? 아버지와의 우정이 무서워 감히 어떨 수 없었겠지요.”
아들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별들이 총총 떠 있었다. 그 별들이 아버지의 눈빛처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