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칠원면 용산리에 구전으로 내로오던 것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가진 자의 베푸는 방법을 신선의 차원으로 가르쳐 주는 재미있는 설화이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칠원에 있는 험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산길이라 길을 잘못 들면 위험한 하다는 것을 잘 아는 박 어사는 이곳저곳을 살피며 길을 가고 있다.
그러다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허어, 어쩌지 여기서 잘못 길을 들면 큰일인데 날도 저물어가고 큰일났구나."
박 어사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물어 볼 사람이 없었다. 산속의 날도 저물어 가자, 박 어사는 겁이 났다.
"어떻게 할까? 되돌아갈까?"
박 어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망설이었다. 박 어사는 할 수 없이 되돌아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때였다. 길 뒤쪽에서 노을을 등지고 한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네 걸음걸이 같지 않게 힘차게 걸어왔다.
박 어사는 두려움 반, 기쁨 반으로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어디로 가시나요? 저가 길을 잃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박 어사 가까이 오자, 박 어사를 아래위로 찬찬히 훑어보고는 아주 짧게 한 마디 했다.
“길이란 것이 마음에 없으면 보이지 않는 것일세. 날 따라 오시게나.”
할아버지는 선문선답 같은 묵직한 말 한 마디를 하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괴나리봇짐을 움켜 안고 뛰다시피 하며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박 어사가 뒤에서 따라가면서 할아버지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회색 두루마기와 옷은 어쩜 스님같기도 한데 머리를 깎지 않았으니 스님은 아닌 것 같고, 간혹 한 번씩 마주치는 눈빛을 보면 그 광채가 무섭게 빛이 나는 걸 보면 도사 같기도 하고..... .“
박 어사가 할아버지와 함께 험한 고개를 넘어가자 이미 날이 저물고 멀리 마을의 불빛들이 보였다.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느 새 길을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두 사람은 마을에서 부잣집으로 보이는 대문을 찾아들어갔다.
대문에 들어서자 말자, 집안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 집안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여 자지러질 듯한 울음을 터트렸다.
먼 산길을 함께 걸어온 할아버지는 박 어사와 그 울음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마치 그 집의 일을 해결하러 온 사람처럼 말도 없이 그 방에 들어갔다.
“길 가는 나그네입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그 방에는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얼굴이 파랗게 질식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와 박 어사가 방에 들어가자, 아이의 엄마 되는 여인이 울음을 멈추고 아이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 아이가 방에서 자다가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질식되어 죽었습니다. 사대독자 아들입니다.”
“그렇군요. 어디 내가 한번 살펴봅시다.”
할아버지는 아이 손목의 맥을 짚어보기도 하고 몸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한참 동안 살피던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 방이 너무 습하군요. 이 방에 자주 지네가 나오지요.”
“할아버지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
“아주머니, 지금 빨리 긴 담뱃대와 짚을 한 단 가지고 오시오. 바쁩니다. 아주 바쁩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후다닥 일어나 윗채로 올라가더니 할아버지가 말한 짚단과 긴 담뱃대를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에게 건내었다.
할아버지는 그 담뱃대를 받더니 재빨리 짚 한 오라기를 담뱃대에 넣어 담뱃대 안을 후볐다. 방안의 사람들은 눈이 동그랬다. 어디서 온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방에 들어와서 죽은 아이 옆에서 담뱃대를 후비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했다.
“자 모두 이쪽으로 나오시오.”
할아버지는 담뱃대를 후빈 지푸라기를 손에 들었다. 아주 진하고 시커먼 담뱃진이 묻어 있는 긴 지푸라기를 들고 아이 가까이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얼굴이 파래서 질식해 있는 아이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의 엄마가 놀래서 할아버지를 밀치려 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죽은 아이의 입을 찢듯이 벌리다니?”
할아버지는 그런 여인의 말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아이의 입을 크게 벌리고 목구멍에다 그 독한 담뱃진이 묻은 지푸라기를 억지로 후벼 넣었다.
그러자,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의 목에 걸려있던 아주 큰 지네 한 마리가 스르르 기어 나왔다.
아이는 긴 숨을 내 쉬더니, 놀래서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엄마와 그 집의 어른들은 기뻐서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그 날 밤, 할아버지와 박 어사는 그 집에서 아주 귀한 손님 대접을 받았다. 귀한 잠자리에서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도 아주 귀한 반찬으로 푸짐하게 먹었다. 박 어사와 할아버지가 아침상을 물리자, 그 집의 어른이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러 왔다. 아이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큰 돈주머니를 할아버지에게 바쳤다.
“저의 아들을 살려주신 은혜의 보답입니다. 적은 돈이지만 여비로 쓰십시오. 천 냥의 돈입니다.”
할아버지는 고맙다는 말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받은 돈 주머니를 휘이익 박 어사에게 던졌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참으로 괴이한 행동이었다.
그 집을 나온 박 어사는 어디를 갈 것인가를 할아버지에게 묻고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성큼성큼 걷기만 했다. 박 어사에게는 할아버지의 그 행동이 그냥 따라오라는 것만 같았다.
“귀신인가? 사람인가? 도사인가? 신선인가?”
할아버지의 그 위엄과 준수한 모습 그리고 번득이는 눈빛이 겁이 나서 박 어사는 할아버지에게 감히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자, 작은 마을 앞에 있는 주막을 지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 주막으로 쑤욱 들어가서 주막의 여 주인을 만났다. 주막 여 주인은 할아버지의 그 준수한 얼굴과 위엄 있는 모습에 무언가에 눌리는 기분으로 할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하게 대했다.
할아버지가 여주인을 앉혀 놓고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처음 대하는 여인을 향해 무섭게 쏘아보며 명령하듯 무섭게 말했다.
“주모, 잘 들으시오. 오늘은 일찍 문을 닫고 장사를 하지마시오. 그리고 누가 와서 문을 두르려도 절대로 문을 열어 주시마시오.”
할아버지와 박 어사는 아래채에 방을 정하고 쉬었다.
그날 오후 정말로 건장한 남자가 문을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다가 집안에서 아무 응답이 없자, 그 남자가 그만 돌아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어디에 몰래 숨어 있던 남편이 시퍼런 칼을 들고 집에 들어왔다. 그 남편은 시퍼런 칼을 휘익 마당에 던지고 자기 아내에게 다가와서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당신이 다른 남자와 내통하는지 의심해 왔소. 어제 오후에 만약에 다른 놈이 우리 집에 왔다면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오. 내가 여태까지 뒷집에 숨어서 망을 보고 있었소.”
주막의 그 여주인은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간부가 들어왔을 것이고 그 간부와 하루 밤을 지내다가 남편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여인은 그 일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했다.
그 여인은 할아버지가 너무도 고마웠다. 여인은 남편 몰래 2천 냥을 돈주머니에 넣어 할아버지에게 주었다.
할아버지는 그 2천 냥이 든 돈주머니를 박 어사에게 획 던졌다. 할아버지는 주막 여인에게 고맙다는 말이나 그 무엇의 표현도 하지 않고, 박 어사를 데리고 휑하니 그 주막을 나왔다.
박 어사는 수수께끼 같은 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전혀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 굳게 다문 입술, 근엄한 표정은 한 마디 말도 붙일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얼마를 걸었을까!
저 아래로 제법 커다란 마을이 보이는 고개 마루에서 두 사람이 쉬었다. 널따란 바위 가까이 오자, 오래간만에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젊은 양반, 여기서 잠시 쉬어가세. ‘암행’이란 남 앞에 자기를 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주 중요한 일의 처리 과정에서 자신의 판단을 바르게 하는 것도 중요해. 나 잠깐 목을 축이고 올게.”
할아버지가 벙긋 웃으며 자리를 떴다. 이제까지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웃음이다. 그렇게 다정하게 말을 하는 것도 처음이다. 더구나 할아버지의 입에서 ‘암행’이란 말을 들으니 정신이 아찔했다. 박 어사는 무언가에 홀리는 것 같았다.
“대체, 내가 암행어사란 것을 할아버지께서 아신단 말인가?
할아버지가 목을 축이고 오시면 꼭 정체를 밝혀야지.”
박 어사는 너른 바위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며 오래간만에 여유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할아버지의 정체에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옹달샘에 가서 목을 축이고 온다던 할아버지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걸어간 계곡의 옹달샘을 가보아도 할아버지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박 어사의 혼란스런 머리가 잠시 맑아지는 듯했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렇구나. 그 할아버지는 신선이구나. 나에게 무언가 계시를 주려고 나타났구나.”
박 어사는 3천 냥의 돈이 든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가 꼬리를 물었다.
그런 박 어사의 눈에 반딧불 같은 작은 불이 깜빡이며 자신의 길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 반딧불은 박 어사의 눈높이 정도에 떠서 나비처럼 자기를 이끌고 있었다. 박 어사는 모든 게 신비롭고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박 어사가 그 반딧불을 따라서 얼마를 걸어 내려갔을까?
산처럼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 양쪽으로 맑은 폭포수가 시원하게 내려 쏟고 있었다.
그 바위 한 가운데 작은 제단 앞에 연꽃처럼 예쁘고 청순한 처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처녀는 박 어사가 가까이 간 것도 모르고 울먹이며 기도에만 열중이었다. 너무 간절한 기도인지 곁에 누가 가도 처녀는 전혀 몰랐다.
“신령님, 산신령님, 오늘이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할머니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나라 돈을 3천량이나 빌려 쓰고 갚지 못해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오늘까지 갚지 못하면 우리 아버지는 죽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비오니 신령님, 굽어 살피소서.”
드디어 처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 어사는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처녀의 아버지의 빚이 3천 냥, 내 등에 돈 주머니에 3천냥!”
박 어사는 어제 그 할아버지가 사람이 아니고 신령님이라는 것에 확신이 갔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3천 냥은 누구의 돈도 아닌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돈이다. 신령님의 돈이다.
처녀의 그 뜨겁고 간절한 기도가 끝났다.
온 얼굴에 눈물이 그렁하게 고인 얼굴로 제단에서 돌아섰다. 처녀가 너무도 가련한 얼굴이었다.
처녀가 돌아서는 순간 낯선 남자와 눈빛이 마주 쳤다. 처녀가 깜짝 놀라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쳤다.
박 어사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말씨도 부드럽게 처녀를 불렀다.
“아가씨, 나와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
처녀가 박 어사를 찬찬히 바라보니 그 모습이 너무도 점잖고 말까지 다정해서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아버지처럼 느껴져서 스스럼없이 다가가 갔다. 박 어사에게 아주 공손하게 절을 했다.
“소녀 이 마을에 사는 <현>자 <규> 자의 장녀 ‘나수선’이라고 하옵니다.”
“그렇구나. 예의도 바르구나.”
박 어사는 처녀에게 할아버지와 있었던 며칠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돈 3천 냥의 말도 빠지지 않고 말했다.
“아가씨야, 이 돈은 내 돈이 아니고 너의 백일기도가 갸륵하여 신령이 할아버지로 변신하여 도운 것이다.”
처녀는 박 어사에게 꿈같은 말을 들었다.
박 어사는 즉시 관가로 가서 그 3천 냥으로 처녀의 아버지를 풀어주었다. 고을 원에게 처녀의 모든 행적을 적어서 임금님에게 올려 효행비를 세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