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으로 물든 산의 아름다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겨우내 움츠렸던 꽃망울이 수줍은 듯 고개를 들더니 어느새 연분홍빛으로 온 산을 물들인다. 물오른 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만산을 뒤덮은 봄꽃의 향연이 상춘객들의 발길을 산으로 이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유명한 산 보다 봄빛의 정취가 오롯이 담긴 여유로움과 정감이 묻어나는 산을 찾는 것은 어떨까?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 있는 백이산은 군북면과 진주시 사봉면의 경계로 해발 468m이며 동쪽으로는 여항산, 서쪽에는 방어산이 두르고 있어 마치 군인이 복병(伏兵)하듯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완만한 산세와 울창한 솔숲, 산 전체를 뒤덮은 진달래꽃이 아름다움을 더하며 느린 걸음으로 자연을 호흡할 수 있는 곳이다. 더불어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의 일화가 전해오는 스토리가 있는 산이기도 하다.
생육신 어계 조려선생이 은거하여 유래된 백이산
백이산이란 명칭은 동방의 백이라 칭송받았던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의 충절을 기려 지어졌다. 조려 선생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여 출사하지 않고 고향 함안에 낙향한 뒤 백이산 아래에 은거하였는데 중국 성인공자인 백이숙제의 인의를 조려 선생에 비유하여 그가 은거하던 산을 백이산이라 칭하고, 들판 건너 남쪽의 낮은 봉우리를 숙제봉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전한다.
어계 선생은 백이산 동쪽 기슭에 사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단종이 복위된 뒤, 나라에서 이 사당에 서산서원의 편액과 재물을 내리고 조려 선생을 생육신으로 배향했다.
울창한 솔숲과 산 전체를 뒤덮은 진달래의 향연
굳이 먼 걸음 하지 않고 가족과 친한 동무들과 봄빛에 취할 수 있는 정겨운 백이산은 주말에 단 2시간으로라도 산행과 함께 역사기행까지 겸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남녀노소의 친숙한 발길이 이어지는 백이산은 오솔길이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져 있고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이 심신을 맑게 해준다.
폭신하게 깔린 부드러운 마른 솔잎의 감촉을 느끼며 S자로 굽어지는 상쾌한 숲길을 사뿐사뿐 걸으면 솔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살랑거리는 봄바람은 두 뺨을 고이 감싼다.
산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바람의 촉감, 산새들의 노래소리가 오케스트라 협찬을 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의 긴장을 훌훌 털어 내어 온전히 순수한 ‘나’로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이삼십 분 남짓 걸으면 산 중턱에 이르는데 체력을 단련할 수 있는 운동기구가 있다. 정상을 0.8km 남겨둔 지점부터는 계속 가파른데 제법 산을 오르는 느낌이 들고, 쉬지 않고 정상까지 오르면 흥건하게 땀이 배어 산행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평평한 정상에는 정자처럼 만들어진 산불감시초소가 있는데 지킴이 어르신이 건네는 따뜻하고 달달한 커피 한잔으로 몸을 추스렸다.
두 손을 번쩍 들어 지호지간인 듯 가까워진 그림 같은 정경을 가슴속으로 끌어와 안아본다. 시간의 흐름이 멈춰 버린 듯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바람도 없다.
제법 산을 타 본 이들은 여항산으로 난 이정표를 따라가면 몇 시간은 족히 산을 탈 수 있고 가벼운 산행을 원하는 이는 오던 길로 다시 내려가거나 공룡발자국으로 적힌 이정표를 따라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공룡발자국 화석과 기묘한 돌탑 등 색다른 볼거리를 접할 수 있다.
중생대 백악기 공룡발자국 화석과 돌탑 그리고 평광숲
공룡발자국 이정표를 따라 쭉 내려가면 태산바위라 부르는 평평한 바위에 중생대 백악기 초식공룡의 것으로 밝혀진 공룡발자국 화석 100여 개가 또렷하게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평광마을에 거주하는 이영부(57)․마금자(53) 부부가 2005년 집 뒤쪽에서 백이산 정상까지 덤불숲을 정리해 새로운 등산로를 개설해 볼 생각에 산행길을 나서던 중, 백이산 중턱 7부 능선 태산암 부근 덤불에 가려진 공룡발자국을 발견해 학계는 물론 방송사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불과 80m 떨어진 인근에서 전기 백악기로 추정되는 7-15t 가량의 초식공룡 발자국 50여 개가 다시 발견돼 공룡발자국 화석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영부․마금자 부부가 쌓은 돌탑 50여 기도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최초로 공룡발자국 화석 발견을 기념하는 동시에 함안사랑의 마음을 담아 4년여에 걸쳐 쌓은 것인데 어느덧 산행길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돌탑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대나무 숲 쪽으로 내려서면 몽골 국왕 주치의를 지냈던 독립운동가 대암 이태준 선생의 생가터를 볼 수 있다. 몽골 초혼에 고혼이 되어 잠들어 있는 선생의 애국혼에 잠시나마 경외심을 가져본다. 마을을 벗어나 도로변으로 들어서 10여 분을 걸으면 수십 그루의 느티나무 거목이 하늘을 가리는 평광숲을 만난다.
그 한가운데 ‘유목’ 또는 ‘절부목’이라 불리는 느티나무에 안타까운 사연이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 주민이 인근 산에 피란을 하고 있었는데 한 처자가 갈증을 못 이겨 마을로 내려왔다 잡혀 주민들의 은신처를 캐묻는 왜적에게 끝내 불응하자 처녀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유방을 도려내어 무참히 살해하였는데 이후로 나무에 젖 같은 혹이 생기고 흰 물이 흘러내렸다는”고 한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그때의 눈물겨운 사연을 간직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숲 안에 조성된 데크로드를 따라 팔각정자와 연못을 둘러본 뒤 잠시 숨을 돌렸다 5분정도 걸으면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서 여정을 마감한다.
백이산은 이처럼 주변의 역사와 유래를 알고 산행길에 나서면 더 없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찾아오는 곳 : 군북역에서 가까워서 열차를 타고 오는 것이 편하다. 또한 차를 이용할 경우, 군북역과 연결된 고가 철로 밑에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주차장 앞에 백이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사진제공 : 함안군 블로그 김은희 기자>